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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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을 품는 노동

2022-07-02 (토) 이은정 휴스턴대학교 조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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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에 돌아온 지 일주일 째, 한국 여행을 하며 내가 만났던 이들과 그들에게서 배운 것들을 생각하는 날이 많아졌다. 오래 전부터 알고 지냈지만 실물로는 처음 뵈었던 동료 응용언어학자 K님은 교육의 현장에서 자신의 교육 철학과 현실의 괴리에서 느끼게 되는 불편함과 학생이 성장하는 것을 지켜보는 것에서 오는 즐거움을 어떻게 다루며 살고 있는지 알려주셨다. 친구의 지인들이었던 K와 L언니들, 그리고 새로 만난 친구 H가 가르쳐준 나를 잃지 않고 일 하는 법은, 지쳐있던 나에게 꼭 필요한 말이었다. J가 들려준 예전 재개발 철거 시위 운동을 하며 배운 것들은 보이지 않는 권력구조에 맞서는 것이 얼마나 지난한 것인지를 알게 해 주었다. 그들과의 짧은 만남에서 나는 공통된 무언가를 생각했다--희망, 그리고 희망을 품는 노동이 그것이었다. 그리고 그러한 삶의 태도는 미국에 돌아온 이후로도 나를 튼튼히 지탱하고 있다. 그 중에 오늘 특별히 생각나는 사람은 대한성공회의 카탈리나 신부님이다.

카탈리나 신부님과의 만남은 아주 우연히 이루어졌다. 친구와 함께 덕수궁 돌담길을 걷기 위해 찾던 중, 우리는 주한 영국 대사관 바로 옆에 있던 대한 성공회 서울주교좌 성당에 우연히 들어섰다. 두리번 거리고 있던 우리를 발견한 카탈리나 신부님은 먼저 우리에게 사진을 찍어 주겠노라 하시며 인사를 건네셨다. 이 성당에서 40년이 넘는 시간을 지내시며 한국 성공회의 대소사와 함께 하신 수녀님은, 예순을 넘기고 신부님이 되실만큼, 책임감과 열정이 가득하신 분이셨다. 여든이 넘으신 연세에도 어떻게 그렇게 오랜 세월동안 한자리를 지키고 계실 수 있었냐는 다소 생뚱맞은 질문을 한 나에게 신부님은 웃으시며 이렇게 말씀해 주셨다.

“지금 입고 있는 이 치마가요, 원래는 한 겹이 더 있었어요. 그런데 이게 너무 덥고 거추장스럽잖아요? 그래서 내가 이거 좀 바꾸자고 제안을 했었어요. 성직자니까 할 일이 얼마나 많은데, 이런 형식적인 것에서라도 좀 자유롭자는 마음도 있었고요. 처음엔 좀 긍정적인 반응이어서 곧 되겠지 했는데, 너무나 가로막는 것들이 많은 거에요. 전통이니까 안된다, 또 뭐가 안된다 그래서 계속 퇴짜를 맞은 거지요. 남들이 보기엔 별 볼일 없는 거라도, 우리에게 중요한 일이니까 놓지 않았죠. 내가 포기하면 다음 세대 수녀님들이 고생을 해야하니까. 그리고 또 인생에서 싸울 게 얼마나 더 많이 있겠어요? 이 작은 것도 포기하면 안되죠. 그런데 이게, 이 조그만 치마 하나 바꾸는 데 10년이 넘게 걸렸어요.”
여든이 넘으신 신부님의 말에서 여러 번 쓰러지고, 여러 번 무너지고, 또 여러 번 거절을 당하고도 천천히 자기만의 싸움을 하는 이에서 보이는 단단한 아름다움을 보았다. 내가 하는 일에 대한 견고한 믿음, 또 그 일이 나 혼자만을 위한 것이 아님을 아는 것, 끝이 보이지 않음에도 지치지 않고 꾸준히 무엇이든 도움이 되는 것을 해 나갈 수 있는 용기는 누구에게도 쉽게 주어지는 것이 아닌, 실천하며 굳건히 지켜내야 하는 것이다.

제대로 곱씹어 볼 여유도 없이 나쁜 뉴스들이 쏟아져 나온다. 미국의 많은 주에서 여성은 임신에 대한 자기 몸 결정권을 더이상 행사할 수 없고, 우크라이나에서는 여전히 많은 이들이 전쟁으로 목숨을 잃고 있다. 샌안토니오에서 인신매매에 사용된 트럭에서 48명이나 되는 피해자들이 사망한 채로 발견 되었고, 환경 보호 기구는 공장의 온실 가스 배출 규제를 전과 같이 할 수 없게 된다. 이런 어마 무시한 뉴스들을 뒤로 하고 한숨을 크게 한번 쉬고는 눈을 감았다. 그리고 카탈리나 신부님을, 그리고 내가 만났던 이들과 그들이 실천하고 내게 가르쳐준 희망을 생각했다. 모든 것이 다 무너지고 부숴지고 불에 타 사라져버리는 것 같을 때, 그래서 개인인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을 것 같을 때,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작지만 큰 일은 다시 희망을 갖는 것이다. 희망을 놓지 않고 품어 나가는 데 드는 노동과 그것의 숭고함을 생각하며, 한숨을 거두고 다시 눈을 떴다. 내가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저항은 나의 작은 하루를 포기하지 않는 것, 내가 서있는 곳에서 희망을 얘기할 수 있는 것이니까.

<이은정 휴스턴대학교 조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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