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오페라 ‘카르멘’에 찬사를 보낸다. 그러나 과연 몇 명이나 편견없이 이 오페라의 민낯에 진정한 찬사를 보낼 수 있을까? 초연 때는 ‘지옥에나 가라’고 혹평이 쏟아졌다고 한다. 물론 그 정도는 너무 과한 것 같고 아무튼 ‘카르멘’은 재미없는 오페라의 전형적인 모습을 답습하고 있었다. 바그너의 경우도 그렇지만 지루함을 견디고 오페라를 감상할 수 있는 것은 매니아층에서나 가능하다. 더욱이 ‘카르멘’은 비제라고 하는, 당시로서는 경량급 작곡가의 작품치고는 너무 심층적이었고 극적인 변화도 무쌍하여, 짧은 오페라 안에 모든 것을 담기에는 무리였다. 비제는 ‘카르멘’을 남기고 3개월만에 사망했는데 작품에 대한 기대가 너무 컸던 모양이었다.
오페라 ‘카르멘’은 비극적인 내용으로 보나 주인공 카르멘의 파멸적인 기질로 보나 여러모로 작곡가 비제 자신에게도 불길한 작품이기도 했다. 비제가 메르메의 소설 ‘카르멘’을 배경으로 작곡한 오페라 ‘카르멘’이 전 유럽에 그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을 때, 작곡가 비제(Georges Bizet, 1838-1875)는 이미 이 세상에 없었다.
비제가 ‘카르멘’에 유혹된 것은 어쩌면 (자신과 반대되는) ‘카르멘’의 지중해적인 정열과 그 발랄함 때문이었는지는 모르지만 아무튼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바쳐 남긴 ‘카르멘’은 결국 비제의 육체와 영혼을 송두리째 삼켜버리고 말았다. (극중) 카르멘은 아름답고 매혹적인 여성이었다. 성냥공장에서 일하는 여공치고는 너무 튀는 모습 때문에 이 남자 저 남자에게 짓밟힐 수 있는 꽃이었지만 카르멘은 오히려 ‘하바넬라’를 부르며 남자들을 지배하려 한다. /사랑은 들에 사는 새와 같이 자유로운 것/그 누구도 길들일 수 없다네/ … 자유분방했던 카르멘은 그러나 돈 호세에게 만큼은 진심이었는지 유치장에 갇힌 돈 호세를 찾아가 함께 도망치자고 애원한다.
그러나 돈 호세는 위험한 줄타기보다는 그저 평범한 사랑을 바랄 뿐이었다. 둘은 기질적으로 서로 맞는 한 쌍이 아니었다. 비극은 여기서 시작되었고, 카르멘의 죽음 또한 비극의 주체로서, 카르멘이 아니라 카르멘을 하나의 꽃으로 남겨두지 못했던 돈 호세였다는 것이다. 이 발랄하고 끼가 넘치는 작품이 당시 파리의 관객들에게 이해되지 못한 것은 관객의 무지 때문보다는 유행을 앞서간 작품 선택이 문제였다고 한다. 음악적으로는 일부 호평이 있었으나 내용이 너무 비극적인데다가 리얼한 것이 문제였다. 물론 유럽은 ‘카르멘’의 발표 이후 사실주의 열풍이 일기 시작하지만 ‘카르멘’의 등장은 시기적으로 너무 이른 것이었다. 그러나 만약 ‘카르멘’이 십여년 늦게 발표됐다면 어땠을까? 아무튼 ‘카르멘’은 그 비극적인 결말조차도 비제의 마음을 유혹했는지 비제는 마치 ‘카르멘’을 위해 이 세상에 태어난 것 처럼 ‘카르멘’에 모든 것을 바친 뒤 저 세상으로 가고 말았다. 그러나 진행형으로서 ‘카르멘’의 불행은 여기까지였다.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이란 어떤 것을 말하는 것일까? 사실 이것은 이 칼럼을 쓰고 있는 필자에게도 가장 난해한 질문이 아닐 수 없는 물음이다. 물론 아름다움이란 피상적인 것만은 아니어서 하나로 정의하기 힘들며 음악의 경우는 더 더욱 다양한 모습을 갖추고 있어서 이것이다 저것이다 말하기가 힘든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절대값이라는 수학적 명제가 있는 것처럼 이 세상에는 분명 심금을 울리는 아름다운 작품이라는 것이 존재한다. 파리의 공연을 마치고 일 년 뒤 비인에서 다시 이 작품을 선보였을 때 그 양상은 사뭇 다른 것이었다. 우선 서로 싸우던 바그너파, 브람스파 할 것 없이 모두 극찬을 쏟아냈다. 그러나 가장 열광적인 환영을 보낸 사람들은 니체같은 음악광들이었는데 그는 ‘카르멘’을 가리켜 ‘지중해의 바그너’, 원초적 예술의 극치라고 평했다고 한다. 그러면 음악에 대한 기준이 조금 까다로운(?) 듯한 ‘앵콜 클래식’의 필자는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우리는 바로크 음악의 ‘바로크’가 ‘일그러진 진주’라는 뜻에서 왔음을 알고 있다. 극 속에서 카르멘은 일그러진 진주의 모습으로 다가온다. 그러나 어딘가 격조가 느껴진다고나 할까. 일그러진 모습과 은은함이 랑데뷰되어 있는 작품… ‘카르멘’은 분명 스페인적인 열정과 비제의 천재성이 랑데뷰하여 빚어낸, 천체쇼와 같은 작품이었다. 아름다움에 꽂혀서 자신의 목숨과 영혼조차 불나방처럼 불 태울 수 있는 것에는 분명 어떤 진실이 존재하는 법이다. 이 작품은 단순히 한 집시여인과 한 기병대 병사의 사랑이야기를 그리고 있는 이야기만은 아니다. 그 속에는 자신의 사랑만을 좇는 돈 호세 무모함, 이것을 흐리게 하는 운명적인 존재로서의 ‘카르멘’ 등 불길한 열정이 있지만 비제가 보여주고 싶은 것은 아름다움과 슬픔, 비극과 환희… 이런 것보다는 어쩌면 꽃처럼 살다가 꽃처럼 지고 싶은… 인생의 솔직한 모습이었는지도 모른다. 영혼으로 써진 글… 누구나 쉽게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영혼으로 써진 음악… 비제가 바로 ‘카르멘’이었고, ‘카르멘’이 바로 비제였다. 길 잃은 자들을 위한 영혼의 팜 파탈… 명작 ‘카르멘’은 발표 당시나 지금이나 결코 불행한 작품만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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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훈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