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좋은 이웃

2022-06-16 (목) 문일룡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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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주 전이다. 내가 다니는 교회에서 있었던 어느 바둑 모임에서 경찰복을 입은 아시아인 하나가 나를 보고 반겼다. 그러면서 자기를 기억하겠느냐고 물어왔다. 순간 당황했다. 어디에선가 본 듯한 얼굴인데 확실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가 실망할 것 같아 그냥 기억한다고 말하고 말았다. 그랬더니 어디에서 자기를 보았느냐고 묻는 게 아닌가. 잘 모르겠다고 하자 그 경찰관은 한 고등학교 이름을 댔다. 그에게 그 학교 청원경찰이었냐고 물었다. 그랬더니 손사래를 치며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 자기는 그 학교 학생이었다고 대답했다. 순간 모든 게 생각났다.

그러니까 약 10년 전이다. 당시에 나는 페어팩스 카운티 교육위원으로 있으면서 학생들의 과외활동으로 바둑 클럽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체스 클럽은 웬만한 학교에 모두 있다. 그러나 체스 보다 훨씬 더 높은 수준의 두뇌 사용을 필요로 하고 역사도 더 깊은 바둑이 페어팩스 카운티 학생들에게 좀 더 소개되면 어떨까 생각했다.

그래서 나름대로 과거에 클럽이 있었던 학교들에 연락도 취하고 기존 클럽들에 도움도 주고 싶었다. 그 당시 그런 생각을 갖고 방문했던 한 고등학교의 바둑클럽 모임에서 가장 실력이 높다는 어느 학생과 바둑 한 판을 두었는데 그 학생이 나를 잊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사실 나는 그 학생과 바둑을 두던 모습이 담긴 사진도 한 장 아직 갖고 있다.


그런데 이제는 어엿한 경찰관이 된 그 학생을 다시 만나게 된 경위는 이러하다. 두 달 전쯤이다. 오래 전부터 잘 알던 한 미국인이 도움을 청해왔다. 팬데믹 전에 내가 몇 달에 한 번씩 주선했던 바둑 모임에 참석하던 사람이었다. 버클리 대학에서 물리학 박사과정 중에 바둑을 배우게 되었다는 그는 북버지니아 지역에서 40년 이상 존속해 온 Nova Go클럽의 멤버였다. (미국에서는 바둑이 일반적으로 일본어 표현인 Go로 불린다.)

내가 그를 처음 알게 된 것은 내가 바둑을 페어팩스 카운티 공립학교들에 좀 더 소개하고 싶다는 생각을 가졌을 당시였다. 그는 한 초등학교에서 학생들에게 바둑을 가르치는 자원봉사를 하고 있었다. 늦게 배우기 시작했지만 물리학자로서 바둑책을 보아가며 찬찬히 실력을 쌓아간 모습이 그가 두는 바둑에 그대로 드러난다. 기력은 내가 마지막으로 두어보았을 때 한국 기준으로 대략 5-6급 정도였지 않았나 싶다. 그러나 인공지능을 통해 공부하는 요즈음 아마도 실력이 제법 더 늘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가 나에게 청한 도움은 다름이 아니라 Nova Go 클럽이 내가 다니는 교회에서 모일 수 있도록 장소 사용을 허락해 줄 수 있겠느냐는 것이었다. 클럽이 오랫동안 버지니아 주 알링턴에서 모임을 가져왔었는데 팬데믹 기간 중 모임 장소를 잃었다고 했다. 내가 다니는 교회 교인 몇명과 바둑을 두어보았고 내 교회도 방문해본 적이 있는데, 지역사회를 위해 교회가 좀 더 개방적인 자세로 교회시설 사용을 허락해줄 수 있겠느냐는 것이었다.

기독교와 직접적 관련이 없다고 볼 수도 있는 바둑 모임, 그것도 외부단체의 정기 활동에 필요한 장소 제공 요청이라 조심스러웠다. 그러나 교회의 훌륭한 시설을 이제 좀 더 적극적으로 이웃과도 나누도록 사고의 전향적 변화도 필요할 것 같아 교회 재단이사회에 보고했다. 고맙게도 재단이사회는 3개월 정도 시범적으로 시도해보자는 결정을 내렸고 이제 한 달이 지났다.

월요일 저녁에 약 10명 정도가 모이는데 참석자의 면모가 다양하다. 노인들도 있고 초등학교 어린아이들도 있다. 고등학교 여학생들도 있다. 백인도 있고 아시아인들도 있다. 아시아인들 가운데에는 태국계, 중국계, 대만계, 일본계가 있다. 직업도 여러가지이다. 은퇴자들을 포함해 변호사, 컴퓨터 프로그래머, 교사 희망자도 있다. 그러나 이들 모두에게 한가지 공통점은 한인교회에 처음 와본다는 것이었다. 이렇게 훌륭한 시설을 가진 한인교회가 있고 한인교회가 선뜻 장소 제공에 협조해줄지도 몰랐다고 했다.

한인 기독교인으로서 좋은 이웃이 된다는 것이 무엇인지 다시 한 번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주는 바둑모임이다.

<문일룡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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