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빅 쇼트”(Big Short)를 기억하는가? 마이클 루이스가 2010년에 발표한 소설 빅 쇼트는 글로벌 금융위기 상황에서 떼돈을 번 투자자들의 이야기를 다룬 작품으로 2015년 동명의 영화로 만들어지면서 뜨거운 화제를 불러 모았다. 2008년도 금융위기가 닥치기 직전까지 수년간 이어진 주택가격 상승이 거품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알아챈 작품 속의 투자자들은 미국 경제의 위기로 이어질 주택시장 거품 붕괴에 베팅해 천문학적인 투자수익을 올린다. 그리고 이를 통해 정교한 듯 보이는 파생금융 상품들이 쓸모없는 쓰레기였다는 사실이 여지없이 폭로한다.
거품에 베팅하는 투자자들이 극소수에 불과한 이유가 뭘까? 개인적 경험, 혹은 믿음과 큰 차이가 나는 예상수익을 가격책정 오류로 판단해 투자를 피하기 때문이다. 주택가격이 선을 넘었다는 분명한 증거에도 불구하고 6조 달러에 달하는 부동산자산이 증발하거나 모기지 담보증권(MBS) 투자자들이 1조 달러의 손실을 입을 만큼 주택시장에 거품이 끼었다는 사실을 믿지 못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시장이 그 정도로 심하게 망가질 리 없다는 통념이 굳건하게 자리를 지킨 탓이다.
하지만 암호화폐의 현주소가 보여주듯 시장은 얼마든지 망가질 수 있다.
지난주 연방거래위원회(FTC)는 “암호화폐가 사기꾼들이 선호하는 결제방식으로 자리잡아가고 있다”고 밝혔다. FTC 보고서에 따르면 암호통화로 이루어지는 대금결제 가운데 4달러당 1달러가 사기거래에 사용된다. 일반적인 거래에서 암호화폐가 차지하는 역할이 작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는 놀랄만한 현상이다,
사실 FTC가 공개한 암호화폐 사기거래의 전체 규모는 2021년 이후 총 10억 달러 정도로 그렇게 많다고는 할 수 없다. 그러나 FTC가 밝힌 수치는 아예 존재하지 않는 자산 구입에 피해자들이 지불한 대가만을 집계한 것이다. 물론 사기를 당하고도 신고조차 하지 않은 피해자들은 집계에서 누락됐다. 게다가 명칭과 달리 안전하지도 않고 코인도 아닌 ‘스테이블코인’ 테라USD처럼 실제로 존재하지만 가치가 전혀 없는 무용지물에 투자자들이 쏟아 부은 대금도 FTC 보고서에 포함되지 않았다. 지난달 테라USD의 붕괴로 180억 달러의 자산가치가 증발했고, 숱한 사람들이 평생 모은 돈을 날려버렸다. 테라USD 창업자들은 그들이 만든 상품의 가치를 믿었고 투자자들의 돈을 훔친 게 아니기 때문에 법적인 의미에서 사기극을 벌인 것은 아니지만, 어쨌건 투자자들은 어마어마한 금전손실을 입었다.
힐러리 알렌은 최근 파이낸셜 타임즈 기고문에서 테라USD가 예외적일만큼 취약했다고 지적했지만, 그에 앞서 스테이블코인의 존재이유 자체를 알기 힘들다. 알렌에 따르면 “스테이블코인은 은행과 같은 중간매체를 피하기 위해 난해하고 비효율적인 기반기술을 바탕으로 출발한 다음 (이익충돌을 일으키는) 중간매체를 다시 집어넣는다.”
많은 애널리스트들이 지적하듯 스테이블코인은 첨단기술에 바탕한 미래형 통화처럼 보일지 몰라도 실제로는 규제를 받지 않는 민간 은행들이 유가 지폐를 찍어내던 남북전쟁 이전 19세기 ‘자유 은행시대’의 미국 은행과 흡사하다. 당시 상당수의 은행이 사기로 인해 도산했지만 대부분은 잘못된 투자로 무너졌다.
요즈음의 일부 경제전문가들은 자유 은행시대를 두둔한다. 암호화폐 신봉자들과 마찬가지로 자유 은행 지지자들이 대체로 자유지상주의자 성향을 지닌다는 사실은 그다지 놀라울 게 없다. 가장 열렬한 자유 은행 지지자들은 환경문제를 부인하고 코비드-19 대응조치에 반대하는 우익 싱크탱크와 연결되어 있다. 어쨌건 자유 은행시대에는 여러 개의 사설 통화가 실제로 유통됐고 교환수단으로 기능했다.
하지만 그건 분명 더 나은 대체물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 당시까지만 해도 미국 재무부가 발행하는 달러화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은 달러화와 정부보험 가입 예금이 엄연히 존재하기 때문에 일상적 비즈니스 거래에서 스테이블코인이 담당하는 역할이 거의 없다. 그렇다면 스테이블코인이 필요한 이유가 뭘까?
동일한 질문의 범위를 암호화폐 전체로 확대할 수 있다. 필자가 참석한 많은 모임에서 암호통화 회의론자들은 지지자들을 향해 기존의 결제수단보다 가상화폐로 더욱 간편하게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냐고 질문했다. 또한 암호통화가 미래의 교환수단이라면 2009년에 도입된 비트코인이 아직도 현실세계에서 널리 사용되지 않는 이유가 무엇이냐는 질문도 나왔다. 그러나 그때마다 돌아온 답변은 영양가 없는 말의 샐러드였다.
물론 범죄자들은 암호화폐를 유용하게 여긴다. 최근 로이터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과거 5년에 걸쳐 가상화폐거래소인 바이낸스는 최소한 23억5,000만 달러에 상당하는 불법자금을 세탁했다. 그렇다면 가상화폐의 합법적인 활용사례가 있기는 한가?
상황이 이런데도 크립토가 의미가 없다는 주장은 도통 먹히지 않는다. 지난 11월 정점에 도달했을 당시 전체 암호통화의 합산가치는 3조 달러에 달했고, 초기 투자자들은 막대한 이득을 챙겼다. 유명 경영대학들이 다투어 블록체인 과목을 신설하는가 하면, 시장들은 저마다 그들의 도시를 암호통화 친화적으로 만들려 열띤 경쟁을 벌였다.
이처럼 가치가 엄청나게 불어나면서 운용자들에게 막강한 정치적 영향력을 제공한 암호통화 자산군(asset class)이 실질가치를 결여하고 있다고 말하는 것은 설득력이 없어 보이지만, 사실 이들은 모래 위에 지은 집이 아니라 허공에 지은 누각이다.
필자는 주택거품과 서브프라임 위기를 똑똑히 기억한다. 우리는 주택거품 붕괴에 베팅한 ‘빅 쇼트’에서 대형사기인 ‘빅 스캠’(big scam)으로 이동했다.
노벨경제학상을 수상한 폴 크루그먼은 현재 뉴욕 시립대 교수로 재직중이며 미국내 최고의 거시경제학자로 평가받고 있다. 예일대학을 졸업하고 MIT에서 3년 만에 석·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뉴욕타임스 경제칼럼니스트로도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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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 크루그먼 뉴욕시립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