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앵콜 클래식] 지구상에서 가장 멋있고 섬뜩한 합창
2022-05-20 (금)
이정훈 기자
청소년 시절 명동 필하모니에서 바그너의 ‘탄호이저 서곡’을 처음 들었을 때 예술지상주의가 무엇인가를, 온 몸으로 전율 할 수 있었다. 예술에 살고 예술에 죽는, 순교자(?)의 모습같은 것이었다고나 할까. 물론 바그너가 그런 순교자였는지는 잘 모르겠다. 다만 당시 그의 음악에서 그런 ‘음악주의’랄까 강력한 어떤 영적인 힘같은 것을 느낄 수 있었다는 것이다. 고전 음악 합창 중 가장 많이 알려진 합창을 꼽으라면 단연 헨델의 ‘할렐루야’, 베르디의‘희브리 포로들의 합창’, 바그너의 ‘순례자의 합창’ 등을 꼽을 수 있겠다. 다만 유감스럽게도 바그너의 ‘순례자의 합창’은 나치 집권 당시 행진곡으로 널리 쓰이기도 했으며 유대인 개스 처형 당시에도 ‘순례자의 합창’이 울려퍼졌다고 한다. 때문에 일부에서는 바그너의 음악을 비난하는 사람도 있지만 음악 자체가 어떤 살인을 유도할만큼 선동적이라든지 또 그 내용이 이를 부추기는 요소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이스라엘에서는 바그너 음악 연주가 절대 용납되고 있지 않지만 사실 ‘순례자의 합창’이야말로 반대로 생각하면 어떤 죄악이나 잘못된 행위도 감싸줄만큼 가장 순결한 아름다움과 감동이 있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기도 했다.
그것이 예술지상주의든 혹은 어떤 백색주의가 깃들어 있든 듣고 감동만 느끼면 됐지 이것저것 따질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며 바그너의 예술을 향유하며 살아왔다. 나이를 먹어감에도 까마득하게 오랜 시절의 그 감동이 여전히 식지 않고 날 것 그대로 다가온다는 점이 가끔 신기하기도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나이때문일까, 그의 음악이 던져주고 있는 숙제도 고민하게 된다.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수많은 유대인들은 바그너의 ‘순례자의 합창’을 들으며 죽어갔다. 바그너의 음악은 반 유대주의적이며 기독교적인 요소가 있었다. 물론 바그너 자신이 기독교를 선전하기 위해 음악을 쓴 것은 아니었고, 경건한 기독교 신자임을 표방한 적은 없었지만 ‘탄호이저 서곡’을 처음 들었을 때 ‘야 이것이야말로 바로 살아있는 성자의 모습과도 비견될 수 있는, 예술이 지향하는 바 가장 고결한 희생정신, 그 순도 깊은 사랑의 성결한 모습은 아닐까하고 느꼈다. 바그너는 타고난 예술적 감성을 지녔던 과대망상가였다. 섬약한 성격에 작은 키, 별 볼일 없는 외모에다 누나들의 품 속에서 자란 때문인지 여성숭배의식이 있었고 평생을 이 여자 저 여자의 품 속을 전전하며 만족하지 못하고 살았다. 종교에 대한 갈망은 있었으나 종교보다는 예술에 헌신했다. 그리고 그 예술적 성공을 위해 필요하면 당시 독일사회에서 성공한 유대인들의 돈을 유감없이 이용했다. 그리고 필요가 없어지면 과감히 등을 돌리기도 했다. 바그너의 반 유대주의는 당시 독일사회에서 성공하고 있던 수많은 유대인 예술가들에 대한 반감과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배경이 된 불륜 사건의 상대 여성 남편이 유대인이었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나치가 바그너의 음악을 이용한 것은 바그너가 표방하고 있는 기독교적 희생정신, 물질 배척주의, 반유대주의가 배경이었는데 나치는 그들이 내세운 그 모호한 문양(십자가처럼 생긴 로고)만큼이나 인류 역사상 가장 무자비한 살상행위를 가장 성결하고 희생정신을 앞세운 바그너의 음악으로 정당화하는 역설적 행위를 저질렀다. 바그너의 음악은 그만큼 강렬했고 두려움과 죄악을 덮을 만큼 성스럽기도 했다.
개인적으로, 기독교 신앙의 여부를 떠나 바그너의 음악을 좋아하고 있다. 또 동시에 기독교 신앙의 여부를 떠나 바그너의 음악을 경계하고 있기도 하다. 그의 음악이 나치에게 이용당했기 때문이 아니라 지나치게 성결을 추구하고 있는 그의 음악이 왠지 백색주의를 연상시키기 때문이다. 기독교적 (서구) 문화의 우수성, 그리고 백인(게르만) 우월주의, 물질주의(황금숭배) 배척 등은 바그너의 예술에서 빼놓을 수 없는 특성 중의 하나였다. 바그너의 예술을 알기 위해 바그너의 모든 작품을 순례하거나 또 ‘탄호이저’라는 작품을 처음부터 끝까지 감상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바로 서곡에 등장하는 ‘순례자의 합창’이 모든 것을 말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고난에 찬 순례자의 영혼이야말로(비너스의) 관능주의를 물리치고 승리한다는 것을 예고하고 있기 때문이다. 바그너는 성직자를 꿈꿨지만 결국 예술가로 남았다. 그러기에 그의 음악은 늘 물질과 영혼의투쟁, 그 구도의 모습을 추구하고 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하나로 종합하라면 바로 ‘탄호이저’에 나오는 ‘순례자의 합창’으로 귀결될 수 밖에 없다. 그것은 고난과 희생을 능가할 그 어떤 사랑도 이 땅에는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또 그것은 그렇기 때문에 다른 어떤 죄도 정당화할 수 있는, 지구상에서 가장 섬뜩한 순례자의 합창이기도 했다. 지구상에서 그 누군가에서 고통을 주고 그 아픔을 회상시키는 음악이 있다면 그 작품은 마땅히 없어져야 한다. 그러나 십자가의 깃발을 높이 들고 이교도들을 학살한 기독교가 여전히 남아 있듯 바그너의 음악 또한 여전히 억울(?)하게 살아남아있다. 인생에서 가장 힘들고 고난스러웠던 순간에 나에게 구원을 안겨주었던 바그너의 음악, 그 고난의 예술이 동시에 많은 사람들에게 아픔을 안겨 주었다는 사실은 나를 숙연하게 만들곤 한다. 인간은 누구나 인생에서 피흘리는 순간이 있기 마련이다. 바그너의 음악이 때때로 많은 사람들에게 구원이 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그 피 흘리는 순간에 바그너의 음악이 그 영혼 위에 한 줄기 강렬한 소나기가 되어 울려 퍼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 지구상에서 가장 멋있고 섬뜩한 합창… 당신은 단 한번이라도 마음속 깊이 피 흘리는, 그 순례의 합창을 들어 본 적이 있나요?
<이정훈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