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인연

2022-05-02 (월) 제이슨 최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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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연’하면 불교에서 말하는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란 말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 인(因)이란 결과를 만들어내는 직접적인 힘을 말하고, 연(緣)은 그것을 돕는 외적이고 간접적인 힘이라고 한다. 다른 말로하면 꽃이 피는 것은 씨앗이라는 ‘인’에 땅과 물과 바람과 햇빛이라는 ‘연’이 만난 결과라는 것이다.

‘범망경’에는 선근인연(善根因緣)이란 말이 나오는데 전생에 좋은 과보를 맺은 사람과의 만남을 겁(劫)으로 표현하고, 1겁의 시간은 물방울이 떨어져 집 한 채만한 바위를 없애는데 걸리는 시간이라고 하며, 힌두교에서는 43억2,000만년을 1겁이라고 한다니 좋은 인연을 만난다는 것은 얼마나 귀한 일인지 모르겠다.

‘인연경’에는 오백겁의 인연이 있어야 옷깃이 한번 스치고, 7,000겁의 인연이 있어야 부부의 인연이 맺어진다고 했으며, ‘잡아함경’에는 겁에 대해 1유순(由旬), 약 15Km쯤 되는 철성(鐵城)안에 겨자씨를 가득 채우고 100년마다 한 알씩을 꺼낸다. 이렇게 겨자씨를 모두 꺼내도 1겁이 끝나지 않는다 했고, 사방이 1유순이나 되는 큰 바위를 100년마다 한 번씩 흰 천으로 닦아서 그 돌이 모두 닳아 없어진다고 해도 1겁은 끝나지 않는다고 하니, 한 겁이 이러할진대 무려 7,000겁의 인연으로 맺어진 부부의 인연이란 얼마나 깊은 것인가?


1,000겁에 한나라에서 태어나고, 2,000겁에 하루 길동무가 되며, 3,000겁에 하룻밤을 한집에서 보낸다. 4,000겁에 한민족으로 태어나고, 5,000겁에 한동네에서 살며, 6,000겁에 하룻밤을 같이 잔다. 7,000겁에 부부가 되고, 8,000겁은 부모와 자식이 되며, 9,000겁은 형제자매가 되고, 1만겁은 스승과 제자가 된다고 한다. ‘범망경’은 부모와 형제자매의 인연보다 1만겁을 잇는 스승과 제자의 인연이 더 귀하다고 했는데, 육신은 부모로부터 받지만 마음을 바로잡는 진정한 깨우침은 참된 스승의 올바른 가르침이 필요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모든 결과에는 원인이 있다. 지금 이 순간의 인연을 귀하게 여겨야하는 이유다. 아무리 작은 모래알도 그냥 물에 던지면 모두 가라앉는다. 그러나 아무리 큰 바위라도 배에 실으면 가라앉지 않는다. 부처님의 가르침인 지혜의 배를 반야선(般若船), 범어로는 프라즈나(Prajna)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인간이 진실한 삶의 의미를 깨달았을 때 얻어지는 근원적 지혜를 말한다.

사람이란 누구를 만나는가에 따라 ‘무술’이가 ‘왕비’가 되기도 하고, ‘왕비’가 ‘무술’이가 되기도 한다. 세상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모두가 저마다의 인연을 가지고 살아가지만 ‘인연’하면 빼놓을 수 없는 애틋한 인연도 있다. 영문학자요 수필가인 피천득 선생님이다. 나는 선생님의 일본 유학시절 하숙집 딸 ‘미우라 아사코’와의 세번 만남과 헤어진 첫사랑 이야기를 잊지 못한다. 풀잎에 맺힌 아침 이슬처럼 영롱한 가슴 시리도록 아련한 사랑 이야기다. 첫사랑은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했던가? 세 번째 만났을 때 아사코는 결혼을 해서 한 남자의 아내가 되어 하숙하던 부모님의 집 근처에 살더라고 했다. 선생님은 그 모습을 보고 돌아와 적잖이 가슴앓이를 했던 것으로 보였다. 그의 수필집 ‘인연’에는 이렇게 씌어있었다. 세 번째 만남은 없었으면 좋았을 것이라고….

어리석은 사람은 인연을 만나도 몰라보고, 보통 사람은 인연인줄 알면서도 놓치고, 현명하고 지혜로운 사람은 옷깃만 스쳐도 인연을 키워간다. 금년은 5월8일이 부처님 오신 날(석가탄신 일)이다. 꼭 불자가 아니어도 인연의 소중함을 가슴에 되새겨봄 직하지 않은가?

<제이슨 최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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