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에 관한 기억투쟁을
2022-04-27 (수)
김용현 한민족평화연구소장
우크라이나 전쟁의 참상이 나날이 커지는 가운데 마리우폴 전투에서만 민간인 사망자 5,000명 이상이 발생할 것이라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대부분의 전쟁에서 민간인 희생자는 전선이 아니라 후방에서 일어나며 우발적인 사고라기보다는 고의에 의한 학살과 대량 공습에 의한 것이라는 사실에 소름이 끼친다. 우크라이나에서 벌어지는 러시아군의 민간인 학살을 보며 우리는 지난 시절 전쟁 속에서 자행되었던 강대국들의 만행을 기억 속에서 떠올리게 된다.
몇해 전 베를린에서 열린 ‘분단 한반도와 독일통일’이라는 주제의 포럼에 참가했던 길에 기차로 2시간 걸려 엘베 강 유역의 역사도시 드레스덴을 방문한 적이 있었다. 2차 대전이 끝나갈 무렵인 1945년 2월13일, 미국과 영국 연합국 측이 승전의 고삐를 쥐기 위해 단시간에 무차별 폭격작전을 감행했던 도시다.
처칠 수상과 의기투합한 영국군 아서 해리스 사령관 휘하의 폭격기는 불과 이틀에 걸쳐 도시의 90%를 파괴하고 민간인 10만 명 이상을 사망케 하면서 아름다운 이 도시를 순식간에 불바다로 만들고 말았다. 독일인들은 이 끔찍한 사건을 기억하기 위해 주요시설의 불탄 자리를 그대로 보관하고 있었는데 다만 바로크 양식의 상징인 성모 교회만은 15년에 걸쳐 복원했다. 당시 미국도 폭격에 가담하기는 했지만 민간인 거주 지역에는 폭격을 자제했다고 한다.
1950년에 있은 한국전쟁은 국가권력이 자기 국민을 대량 학살한 가장 야만적인 전쟁으로 기록된다. 전쟁초기에 경찰은 보도연맹 관련 등 좌익혐의자들을 계곡과 산으로 끌고 가 참혹하게 처형했는가 하면 북한군은 그들의 점령기간 우익인사와 군경가족들을 민족반역자로 분류해 무차별적으로 사살했다. 그렇게 해서 약 100만 명 정도의 민간인이 학살되었다는 통계가 있는데 이 숫자는 당시 남한 인구 2,000만 명의 20분의 1에 해당한다.
피난 시절 내가 다닌 황간중학교는 충청북도 영동군 황간면 읍내에 있었고 학교로부터 불과 2 km도 안 되는 곳에 노근리 쌍굴 다리가 있었다. 1950년 7월, 이 굴속으로 피난 갔던 양민들이 미군의 무차별 기관총 사격으로 400여명이나 몰살당했던 바로 그곳이다. 휴전 직후라 같은 반에 당시의 유족이 없을 리가 없었는데도 아무 것도 몰랐던 중학교 2학년 철부지 아이는 ‘통일 아니면 죽음을 달라’는 웅변대회에 나가 열을 올렸고 매일같이 학도호국단이 주최하는 ‘적성국 감시위원단 축출 궐기대회’에 참가하고 있었다.
미군이 한국 민간인 학살의 공동정범이 되었던 노근리 사건은 반세기의 세월이 지난 1999년에야 비로서 세상에 알려졌지만 미국정부 차원의 공식적인 사과나 보상은 끝내 없었다. 그러나 당시 미군에게는 인민군의 기습공격에 대비한다는 명목으로 피난민 대열이나 민간마을에 대해 B-29기의 무차별 폭격과 기총소사의 명령이 내려져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오늘은 마침 4.27 남북합의서가 선포된 지 4주년이 되는 날이다. 한반도 안팎으로 긴장이 고조되고 있으나 또다시 전쟁의 먹구름이 몰려오는 날, 그때는 부자든 가난한 사람이든 보수든 진보든 가리지 않고 엄청난 피해를 보게 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모든 것은 자꾸 잊혀져간다. 망각되고 왜곡된 과거를 찾아나서는 기억투쟁은 참혹한 전쟁을 끝막음하기 위해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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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현 한민족평화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