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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탈린그라드, 쿠르스크, 그리고 돈바스

2022-04-26 (화) 민경훈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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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의 미국인들은 제2차 세계 대전에서 기억나는 전투를 꼽으라면 노르망디 상륙 작전을 떠올릴 것이다. 2차 대전은 물론이고 인류 역사상 최대 규모의 상륙 작전이었을뿐 아니라 파리를 비롯한 서유럽을 나치에게서 탈환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는 점을 감안하면 놀랄 일은 아니다.

그러나 2차 대전 중 벌어진 다른 전투와 비교하면 여기 동원된 병력 규모는 의외로 작다. 작전 개시일인 1944년 6월 6일 해변에 상륙한 연합국 병사수는 2만4,000명, 작전 전체에 동원된 육군과 해병 수도 15만 정도였고 5만 명의 독일군이 이에 맞섰다. 사상자 수는 연합국 1만, 독일군 9,000 이하였다.

이에 비해 동부 전선 최대 격전지의 하나였던 중앙 아시아 볼가강 유역의 스탈린그라드 전투에는 사상자만 독일군 70만, 소련군 110만이 넘었고 독일 비행기 900대, 탱크 1,500대, 소련군 비행기 2,700대, 탱크 4,300대가 파괴됐다. 1942년 8월부터 1943년 2월까지 장장 8개월에 걸친 이 전투에 독일과 소련 모두 명운을 걸고 모든 것을 쏟아 부었고 결과는 소련의 승리였다.


이 전투로 독일의 최정예 부대인 제6군이 궤멸됐지만 히틀러는 포기하지 않았다. 1943년 7월 인근 쿠르스크에서 ‘성채’라는 이름으로 대대적인 반격에 나선다. 이 때 동원된 독일군 수는 70만, 그 뒤 펼쳐진 소련군 반격에 맞선 독일군 수는 94만에 달하고 ‘성채’ 작전에 동원된 소련군 수는 190만, 그 후 반격에 나선 소련군 수는 250만에 이른다. 이 두 작전으로 인한 독일군 사상자수는 20만, 소련군은 120만에 달하며 부서진 비행기와 탱크수는 독일군 600대, 1,200대, 소련군 3,000대, 7,000대로 추산된다. 말이 그렇지 부서진 탱크수만 7,000대라면 그 전투의 규모가 어느 정도인지 짐작이 간다. 이 전투가 ‘인류 역사상 최대 규모의 탱크전’으로 불리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이 전투 또한 막대한 희생을 치른 대가로 결국 소련의 승리로 돌아가고 그 이후 독일은 한번도 승기를 잡지 못하고 패퇴를 거듭한다. 2차 대전 유럽 전선의 승패는 중앙 아시아 평원의 이 전투에서 결정됐다 해도 과언은 아니다. 여기서 주요 병력 대부분을 잃은 독일은 연합군의 서유럽 상륙이 예상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방어선을 보강할 여력이 없었다. 그 결과가 나치 독일의 패망이다.

80년 전 유럽의 운명을 결정한 전투가 벌어졌던 중앙 아시아의 평원이 다시 한번 전쟁의 화염에 휩싸이고 있다. 단시일내 우크라이나의 수도 키이우를 점령한 후 볼로도미르 젤렌스키 대통령을 축출하고 친러 허수아비 정권을 세우려던 기도가 실패로 돌아가자 러시아는 여기서 철수한 후 우크라이나 동남부 돈바스 침공에 전력을 기울이고 있다.

이곳이 러시아 손에 넘어가면 이미 친러 반군이 장악하고 있는 루한스크 일대와 2014년 합병한 크림반도가 육로로 연결되며 우크라이나의 최대 흑해 항구인 오데사가 사정권에 들어온다. 오데사마저 떨어지면 우크라이나는 흑해 항로가 봉쇄되고 사실상 독립 국가로서의 지위를 위협받게 된다. 그럴 경우 푸틴은 위장 평화 공세를 펼치며 휴전을 제안하고 이들 지역을 확실히 장악한 후 다시 한번 키이우 침략의 기회를 노릴 것이다. 이렇게 되면 푸틴의 지위는 공고해지고 나토 동맹국들은 직접적인 러시아의 위협을 받게되며 전세계 독재 정권의 기세는 높아지고 자유 민주주의 세력은 위축될 것이다.

돈바스 사태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는 미국은 이미 8억 달러의 군사 원조를 승인한 데 이어 지난 주 다시 8억 달러의 군사 자금과 5억 달러의 경제 지원 등 13억 달러의 추가 지원을 시행했다. 이로써 미국이 지금까지 우크라이나 지원에 쓴 돈은 40억 달러에 달하며 바이든 행정부는 의회에 추가 지원도 요청할 계획이다.

거기다 지난 주말 미국은 외교와 군사의 최고 사령탑인 앤서니 블링컨 국무장관과 로이드 오스틴 국방장관을 키이우로 급파했다. 이들과 젤렌스키 대통령과의 회담에서는 지금까지 우크라이나에 보냈던 스팅어나 재블린 같은 수비용 대전차 무기뿐 아니라 돈바스 평원에서 벌어질 전투의 특성상 필요한 탱크와 장갑차 등 우크라이나가 원하는 중장비 무기 지원 방안이 논의될 것으로 보인다.

객관적인 전력은 러시아가 우세지만 이곳으로 파견된 러시아 병력은 신참이거나 키이우 전투 패잔병이 대부분이다. 조국을 지키겠다는 각오와 키이우 승전에 고무되고 서방의 첨단 무기로 무장된 우크라이나 장병들은 그리 호락호락한 상대가 아닐 수도 있다. 앞으로 수개월, 길게는 수년까지도 걸릴 것으로 예상되는 돈바스 전투의 결과가 향후 유럽과 세계의 운명을 결정할 것이다.

<민경훈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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