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음악적인 존재이다. 그것이 클래식이냐 아니면 대중음악, 뽕짝, 팝송을 좋아하느냐가 다를 뿐이다. 이 난에서 클래식 이야기를 계속 이어가고 있는 이유는 음악 속에 詩… 즉 인문적인 사상이 흐르고 있다는 생각에서이지만 그것 역시 명확히 무엇인지를 설명하라면 아마도 영원한 수수께끼일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음악은 그저 듣는 사람의 감성과 지성, 상상력 등에 따라 조금씩 다르게 들려 올 뿐 딱히 어떤 음악이 더 좋거나 나쁜 음악이 있을 턱이 없다. SF오페라의 김은선 지휘자도 ‘모든 작곡가의 음악은 각자의 장점이 있기 때문에 더 좋은 작곡가의 음악은 없다’라고 했다. 그럼에도 사실 나의 경우 더 좋아하는 작곡가의 음악이 분명히 존재한다. 특히 오페라의 경우 베르디의 음악을 좋아하는 것이 그것이다. 바그너 등 다른 작곡가의 음악을 싫어한다는 뜻이 아니라 ‘아, 이거다!’하고 생각되는 음악이 그렇다는 뜻이다.
베르디는 바그너와도 종종 비교되곤 하는데, ‘바그너 매니아’라는 말은 있어도 ‘베르디 매니아’라는 말이 없는 것이 조금 섭섭하고 이상하다. 물론 이태리의 국뽕들은 모두 베르디를 신처럼 받들고 있지만 이태리를 조금 벗어난 곳에서의 베르디의 이름이 그저 ‘춘희’, ‘아이다’의 작곡가 정도로만 알려져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왜 ‘바그너 매니아’는 있어도 ‘베르디 매니아’는 없는 것일까?
베르디는 우선 남성 중심적인 음악을 쓴 작곡가였다. 여기서 어떤 성적 차별을 이야기하려는 것이 아니라 여성 숭배 사상이 있었던 바그너와는 달리 베르디는 바리톤을 중심으로 한 아버지 상이 작품의 중심이었고 또 주인공으로 자주 등장한다는 것이다. 선율도 과묵하고 남성적이며 짧고 간결하다. 무엇보다도 극적인 요소에 있어서 반복과 과장이 없으며 낭만적인 바그너와는 달리 다소 투박하기 조차했다. 소위 오이디푸스 콤플렉스가 있는 남성들에게는 베르디의 예술이 조금 따분하고 꼰대(?)로 비쳐질 수 있었다는 것이다. 반면 바그너는 애정결핍증을 가진 남성들에게 어필하는, 여성중심적인 선율로 남성들의 모성애를 자극하며 19세기 최고 작곡가의 반열에 올랐다. 음악 중심의 작곡 즉 서곡이나 오페라 발췌곡 만으로도 어필할 수 있었던 바그너와는 달리 오페라로 직접 만날 기회가 적었던 사람들에게 선율적 반복이 없고 극적인 요소만이 가득했던 베르디의 음악은 조금 생소할 수 밖에 없었다. 사람들이 극음악, 극음악 하지만 사실 극음악이란 바로 베르디의 음악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바그너의 음악은 극음악이 아니라 악극 즉 음악을 위해 극이 시녀 역할을 할 뿐이었다. 바그너의 음악은 오페라 홀에 가서도 눈을 지긋히 감고 들어야 더 폼나게(?) 들려올 때가 있다. 베르디는 그 반대였다.
80년도 들어 VCR이 본격적으로 일반가정에 배부되기 시작했고 오페라의 경우도 영화와 마찬가지로 VCR을 통해 녹화된 작품들이 다수 시장에 출시되기 시작했다. 게중에는 오페라 하우스의 공연뿐만 아니라 영화처럼 무대를 좀 더 극적이고도 화려하게 촬영하여 음악을 더빙한 것들도 있었는데 80년도 중반에는 대중들도 쉽게 접할 수 있을만큼 저렴한 가격의 오페라 VCR들이 많이 출시됐다. 물론 VCR을 통한 오페라 감상의 질을 따지자면 실제 공연과는 비교할 수 없는 차이가 있었지만 베르디와 같은 오페라의 천재를 만나게 하는 방법으로서의 VCR의 역할은 가히 충격적이었던 것도 사실이었다. (나의 경우 역시 베르디를 만날 수 있게 된 이유이기도 하지만) 그것은 하나의 VCR을 통해 흐르는 영상… 그리고 음악과 자막이 제공될 뿐이었지만 왜 세상에 곳곳마다 심포니 홀이 있고 또 오페라 하우스가 따로 있는지를 알게 하는 순간이기도 했다.
앞서 기술한 바와 같이 세계 각처에는 심포니 홀이 있고 또 오페라를 위한 오페라 하우스가 따로 있다. 즉 기악만을 위한 공연이 있다면 그 장소가 다른 것 처럼 오페라를 위한 극음악이 따로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음악을 표현하는데 있어서, 모차르트가 만든 음악을 교향악으로 연주하는 것과 성악을 입혀서 오페라로 연주하는 것이 과연 어떻게 다를 수 있을까? 물론 모차르트가 만든 음악에 성악을 입히면 오페라, 그냥 연주하면 교향악이 되는 것 또한 사실이었다. 오페라가 기악음악과 극 음악으로서의 그 노선을 분명히 달리하기 시작한 것은 사실 베르디에서부터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베르디는 그 전의 이태리 벨칸토 그리고 모차르트와 바그너와도 다른, 음악을 위한 무대(劇)가 아니라 무대를 위해 음악을 썼던, 아마도 오페라의 독창성을 가장 효과적으로 발휘한 최초의 인물이라고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빅톨 위고는 자신의 작품을 오페라화한 ‘리골레토’를 보고 자신이 음악을 할 수 없었다는 것에 크게 탄식했다고 한다. 즉 듣는 오페라만이 아니라 보는 오페라의 (문학적인)장르를 새로 연 사람이 바로 베르디였다는 것이다. 물론 여기서 베르디의 음악이 극의 요소를 빼고는 존속할 수 없다는 뜻이 아니라 그의 비범한 극적 감각이야말로 교향악에서의 베토벤에 필적할만한 감동과 에너지로 가득한 천재의 그것이었다는 점이다. VCR의 장점은 무대를 좀 더 화려하게 꾸밀 수 있다는 것이고 약점은 살아 숨쉬는 듯한 호흡이 느껴지지 못 하는, 죽은 공연이라는 점이지만 다만 VCR 화면만으로도 베르디와 그의 대작들이 전할 수 있었던 감동이야말로 문명의 이기가 거둔 승리이자 오페라의 승리이기도 했다. You Tube 등에도 나와있는 베르디의 ‘나부코’, ‘리골레토’, ‘일트로바토레’, ‘오델로’ 등은 꼭 추천하고 싶은 명작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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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훈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