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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전범을 지금 응징하는 법

2022-04-19 (화) 민경훈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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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발견된 가장 오래된 전투의 흔적은 나일 강변 이집트와 수단 경계에 있는 제벨 사하바 묘지다. 기원전 1만2,000년 되는 이 묘지에 묻힌 인간의 45%가 흉기에 맞아 사망한 것으로 분석된다. 그러나 이 때만 해도 부족의 수도 작았고 무기래 봐야 돌 몽둥이나 돌화살 정도였을 것이다.

본격적인 전쟁은 문명과 함께 시작된다. 소위 4대 문명이라 불리는 이집트, 메소포타미아, 인더스, 황하 문명이 모두 청동기 시대에 일어났고 청동기의 주 사용처가 무기였다는 사실은 무기와, 전쟁, 문명의 상관관계를 보여준다. 청동기로 무장한 전투 집단이 돌맹이밖에 없는 주민들을 복속시켜 노예로 삼고 대규모 농업을 일으켜 지배 계급이 된 것이 문명의 시작인 것이다.

고대 전쟁은 상상하기 힘들 정도로 잔인했다. 유대의 마지막 왕 제데키아는 기원전 6세기 바빌로니아에 정복당해 아들이 모두 살해되는 것을 지켜보고 눈을 뽑힌 후 포로로 끌려갔다. 중국 은나라에서는 적장의 목을 벤 후 머리를 삶아 먹는 관습이 있었고 제나라 때는 반란군의 수괴를 잡아 젓갈을 담가 먹었다는 기록이 있다.


서양도 만만치 않다. 불가리아의 크룸 황제는 자기 나라를 쳐들어온 동로마의 니케포로스 황제를 811년 바비차 전투에서 살해하고 황제의 두개골에 은을 입힌 후 와인컵으로 사용했다. 그 보복으로 1014년 동로마의 바실 2세는 불가리아를 클레이디온 전투에서 격파한 후 포로 1만4,000명을 100명씩 나눠 99명의 눈을 멀게 한 후 남은 한 명이 이들을 데리고 본국으로 가게 했다. 이 모습을 본 불가리아의 사무엘 황제는 심장마비로 사망했다고 한다.

이러던 중 아무리 전쟁이라도 지켜야 할 금도가 있다는 반성이 일기 시작했고 ‘전쟁 범죄’라는 개념이 생겨났다. 1474년 신성 로마 제국은 페테르 폰 하겐바흐 장군을 전범으로 기소해 유죄 판결을 내리고 그의 목을 잘랐다. 그의 이름은 전범으로 처벌된 첫번째 사례로 역사에 남아 있다.

그 후 서방은 1899년과 1907년 헤이그 협정, 1949년 제네바 협정을 통해 전쟁 범죄를 처벌할 수 있는 법적 근거를 마련했다. 제네바 협정에는 러시아를 비롯한 유엔 회원국 모두가 서명했다. 전쟁 범죄에는 고의로 적국인을 살해하거나 고문하는 행위, 물건을 파괴하는 행위 등 여러 항목이 있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민간인에 대한 학살이다.

전범을 처벌하기 위해 2002년 헤이그에 국제 형사재판소가 설립됐고 실제로 세르비아의 슬로보단 밀로세비치, 보스니아 세르비아의 라도반 카라디치, 리베리아의 찰스 테일러 등이 체포돼 처벌을 받았거나 재판 도중 사망했다.

러시아 군이 키이우에서 물러간 후 부차를 비롯 곳곳에서 민간인 학살 정황이 속속 드러나고 있다. 이들 중 상당 수는 두 손이 묶인채 뒤통수에 총을 맞은 것으로 나타났는데 이는 총알을 낭비하지 않겠다는 볼셰비키 이래 소련의 대표적 살해 방식이다. 문제는 전쟁 범죄가 저질러졌다는 것이 확인되더라도 푸틴은 말할 것도 없고 이 일을 저지른 장군과 병사들을 처벌하기가 사실상 어렵다는 점이다.

최근 서방 각국이 추진하고 있는 푸틴 측근의 요트와 별장을 차압하는 방법도 있지만 이는 시간도 많이 걸릴뿐 아니라 액수가 크지 않다. 그래서 최근 수면 위로 떠오른 것이 러시아의 국부를 몰수해 이를 우크라이나 군사 지원과 복구 비용으로 쓰자는 방안이다.

현재 러시아의 국부는 6,000억 달러로 추산되며 이 중 절반이 서방 각국에 흩어져 있다. 이들은 현재 동결 상태로 묶여 있지만 아직도 러시아 소유라는 사실은 변함없다. 하버드 헌법학 교수인 로렌스 트라이브는 최근 뉴욕타임스 기고를 통해 미국에만 1,000억 달러의 러시아 국부가 존재한다면서 바이든 대통령은 이를 몰수해 사용할 수 있는 법적 권한이 있다고 주장했다.


2003년 아들 부시는 17억 달러의 이라크 국부를 몰수, 이라크 테러 피해자 지원금으로, 2012년 연방 의회는 이란 국부를 이란 테러 피해자 지원금으로 쓴 바 있다. 바이든 행정부도 지난 2월 70억 달러의 아프가니스탄 국부를 몰수해 아프간 인도적 지원과 테러 피해자 지원금으로 쓰는 작업을 시작했다.

일부에서는 이것이 “적법 절차”와 “적절한 보상” 없이 개인 재산을 몰수 할 수 없다는 헌법에 위배되지 않느냐는 우려를 제기하고 있지만 헌법이 보호하는 것은 ‘개인’ 재산이지 ‘국가’ 소유 재산은 포함되지 않으며 1977년 제정된 ‘국제 비상 경제권법’은 대통령에게 외국 국가 재산을 몰수할 수 있는 권한을 주고 있다.

푸틴과 그의 측근들이 도둑질한 러시아의 국부를 우크라이나 군비와 재건 비용으로 쓴다면 그것은 러시아 전범들에 대한 가장 따끔한 시적 정의가 될 것이다.

<민경훈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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