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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콜 클래식] ‘키예프의 대문’과 ‘음악의 변용’

2022-03-25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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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다시 부활한다든지 또 어떤 형태로 변용(變容)한다든지 한다는 생각은 슬픔에 빠진 사람들에게 위로를 주기는 하지만 실존적인 느낌과는 조금 거리가 있다. 감동은 오히려 죽음이 주는 어떤 진실과 마주했을 때 비로소 느끼게 되는 영혼의 각성인지도 모른다. 젊은 시절 음악과 더욱 한 걸음 더 나가게 했던 작곡가가 바로 무소르그스키였다. 요사이 러시아의 침공으로 전세계가 불안에 떨고 있는 바로 우크라이나 사태와도 관련이 있는 ‘전람회의 그림’ 중 ‘키예프의 대문’을 듣고 난 뒤였다. 단순히 소리가 커서였다기 보다는 영혼을 후벼파는 어떤 통곡이랄까, 울분이랄까, 온몸으로 쥐어 짜는 듯한 절규의 소리가 단순히 영혼뿐만 아니라 골수까지 찌릿하게 울리는 그런 진실의 소리로 가슴 속 깊이 울려 퍼지는 듯 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왜 음악을 좋아할까? 사실 여러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어쩌면 모두들 감동을 느껴보기 싶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즉 감동을 통한 인격의 변화, 뭐 이런 것들이겠지만 음악에서도 종교에서처럼 성화된 인격으로의 변화가 가능하다는 것을 믿은 사람이 바로 바그너이기도 했다. 아무튼 부활절이 다가와서가 아니라 지난 한 주는 바하의 ‘부활절 오라토리오’, 하이든의 ‘천지창조’ 등과 같은 종교곡들을 들으면서 지냈다. 리하르트 스트라우스의 ‘죽음과 변용’, 말러의 ‘부활’ 같은 곡도 종교곡은 아니지만 부활 사상이 녹아있는 작품들이어서 찾아 들었다. 말러의 ‘부활 교향곡’에는 ‘살기 위해 죽노라’하는 합창 글귀가 눈에 띄지만 ‘살기 위해 죽는다’는 뜻이 어딘가 장엄하지만 실존적으로 가슴에 다가오는 그런 ‘변용’에 대한 감동은 솔직히 진하지 못한 것이 사실이었다. 오히려 ‘죽음과 변용’에 대한 감동은 무소르그스키의 예술을 들을 때, 음악을 매개로 변용을 추구했던 그 짧고 굵게 살다간 울림의 진실이 가슴에 전달되곤 한다. 알려진 작품이라야 고작 열 손가락 안에 꼽을 수 있는 숫자에 불과하다. 그나마 ‘전람회의 그림’, ‘민둥산의 하룻밤’ 오페라 ‘보리스고두노프’ 등이 전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소르그스키야말로 러시아의 가장 개성있는 작곡가로 꼽힐 뿐만 아니라 후에 인상주의, 현대음악 등을 태동시키는데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특히 그의 피아노곡 ‘전람회의 그림’은 라벨의 오케스트라 편곡에서 알 수 있듯이 다른 많은 음악가들의 영감의 원천이 됐고 근대 음악사의 중요한 작품 중의 하나로 한 페이지를 장식하고 있다. 음악 학교를 다녀본 적이 없는 무소르그스키는 곡 하나를 완성시키는데 많은 세월을 소비하곤 했다. 오페라 ‘보리스 고두노프’를 작곡하는데 4년, 처녀작 ‘민둥산의 하룻밤’은 무려 10년이나 걸렸다고 한다. 그러나 건축가이며 화가였던 그의 친구(하르트만)의 급작스런 사망으로 그의 유작 전시회에 참석하게 되었을 때는 어떤 영감을 받았는지 이번에는 ‘전람회의 그림’을 한 달도 못 걸려 단숨에 완성하였다고 한다.

피아노 곡으로서, 모두 10개의 표제를 가지고 제목에 따라 각기 독특하게 묘사되고 있는데 그중에서도 ‘옛성’, 8번째곡 ‘카타콤베’, 마지막 곡 ‘키예프의 대문’등이 유명하다. 마치 한 사람의 죽음이 이루어 놓은 감동의 선율이었다고나 할까.

요사이 우크라이나 - 러시아 전쟁 발발 때문에 우크라이나의 승리를 기원하는 ‘키예프의 대문’ 영상이 많이 업로드 되고 있다고 한다. ‘키예프의 대문’ 즉 무소르그스키의 ‘전람회의 그림’에는 다음과 같은 에피소드가 전해져 오고 있다. 과묵하고 침울했던 무소르그스키는 친구가 별로 없었으며 늘 혼자 지내며 술을 마시던 외톨박이였다. 음악 평론가 블라드미르 스타서브는 이러한 무소르그스키에게 그의 친구를 한 명을 소개해 주었는 데 바로 빅토르 하르트만이란 자였다. 건축가이자 화가이기도 했던 하르트만은 무소르그스키와 마음이 맞았는지 곧 절친이 됐고 사망하기 하루 전날까지도 같이 술을 마시며 지냈다. 길을 가던 하르트만은 갑자기 어지러움증을 호소했고 벽을 짚고 선 그에게 무소르그스키는 무심코 ‘숨을 내쉬어 봐. 그리고 계속 걸어가자구’했다고 한다. 다음날 동맥 파열로 사망한 하르트만의 소식을 들은 무소르그스키는 크게 쇼크를 받았고 친구의 이상했던 증세에 너무도 무관심했던 자신을 자책했다고 한다. 스타서브의 주선으로 몇 달 후 그의 유작 전시회가 열렸는데 무소르그스키는 친구의 죽음, 또 그가 남긴 작품들에게서 강한 영감을 받고 단 3주만에 이 작품을 완성했다. 그러나 음대를 나오지 않은 무소르그스키였기에 그의 작품은 사후 5년 뒤에야 림스키콜사코프의 수정을 거처 출판됐고 그나마 오리지날 피아노 작품보다는 라벨이 (다소 수정을 가한) 오케스트라 편곡 때문에 유명하게 되었다. 무소르그스키는 친구이며 음악원 교수였던 림스키콜사코프에게 ‘음악 교육은 창작의 개성을 없앤다’라고 했다는데 작곡 수법에 다소 문제가 제기됐던 무소르그스키의 원본 악보는 사후 50년이 지난1931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파울 라므라는 자에 의해 소련에서 출판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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