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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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미의 여유

2022-03-19 (토) 김영수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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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한 녀석이 걸려들었구나. 검은 등껍데기를 가진 곤충이다. 한눈팔다 걸렸을까, 급히 가다 걸린 걸까. 나는 거미줄 앞으로 다가가, 벗어나려고 할수록 결박되는 삶의 아이러니를 목도한다. 거미줄과 먹잇감 사이에 벌어지는 서사는 단순히 먹고 먹히는 문제가 아니다. 불면 날아갈 것 같은 거미줄이 쇠심줄보다 질기다는 걸 저 곤충이 진즉에 알았다면 뭔가 달라졌을까.

미물의 꽁무니에서 나온 색깔도 없는 가느다란 줄이 방패같이 견고한 곤충 껍데기를 무력하게 만들다니. 이제 그 줄 위에서 생사를 가름하는 겨루기가 펼쳐질 것이다. 덫에 걸린 자가 몸을 뒤틀며 운명에 저항하지만 결국 투항으로 끝나고 마는 시간 싸움. 체력을 방전하는 소모전은 패자 쪽 어깨에 얹힌 짐일 뿐 고단수 승자에게는 가당찮은 일이다. 죽음을 눈 앞에 둔 곤충의 공포심이 극에 달할 때마다 거미줄이 한 차례씩 흔들린다. 허기를 채울 독식을 예견하는 포식자가 경계를 풀면서 거미줄이 또 한 차례 출렁인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함정에 빠지고 덫에 걸리며 살아가는가. 온갖 맛있고 멋있는 것들이 거미줄에 매달린 이슬방울처럼 빛나며 가까이 더 가까이 오라고 손짓한다. 허욕에 물든 자들이나, 삶에 지친 이들에게는 더없이 아름다운 유혹이다.


‘눈 앞의 저 빛/ 찬란한 저 빛/ 그러나/ 저건 죽음이다// 의심하라/ 모오든 영광을’

유하의 시 <오징어>다. 불나방이나 오징어만 불빛을 경계해야 하는 게 아니다. 모든 생명붙이는 휘황한 불빛을 의심할 줄 알아야 한다. 대개는 끈끈이 줄에 걸린 다음에야 그것이 벗어나기 어려운 유혹의 덫이었음을 깨닫는다. 상대는 거미다. 그는 자기가 만든 자기 집에서도 끈끈이 줄을 피해가며 다닐 정도로 신중하다. 그건 그만큼 치밀해야 제가 놓은 덫에 제가 걸리지 않고 그 세계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는 걸 안다는 의미다.

코로나 사태로 외출할 일이 거의 없었다. 마트에 장보러 가거나 동네 산책하는 것으로 나의 행동반경이 좁혀진 지 오래다. 운동화만 신다가 간만에 구두를 꺼냈다. 한쪽 발을 구두에 집어넣는 순간 뭔가 느낌이 수상쩍었다. 스타킹에 하얗게 들러붙는 이것은 아아, 거미줄. 대체 신발에 어떤 먹잇감이 들어올 걸 기대했기에 이 안에 집을 짓겠다고 생각했을까. 터를 잘못 잡은 탓에 기웃거리는 날파리 하나 없었나 본데, 그렇다면 이 집주인은 대체 며칠 동안이나 굶었다는 말인지.

제 집에 인간이라는 거대한 동물의 무지막지한 발이 치고 들어오면 자기 목숨이 날아갈 지경에 이른다는 것쯤은 알아챘겠지. 누군가가 거미줄을 송두리째 망가뜨린다 해도 겁날 것 없다 생각했으려나. 다시 지으면 그만이라는 여유도 없이 그만한 배짱도 없이 어찌 이 험난한 세상을 견디겠느냐, 인고의 미덕이 인간만의 전유물인 줄 알았느냐 싶었던 것일까.
작정한 일이었든 실수였든, 곤충이 거미줄에 걸린 것처럼 일이 꼬이고 얽혔을 때는 가만히 멈춰서 자기가 붙잡힌 줄이 어떤 줄인지 파악해야 한다. 침착할 것. 포식자가 먹잇감의 일거수 일투족을 지켜보며 지치기를 기다리는 건 아닌지. 자기가 바르작거려서 줄이 한 번이라도 더 움직이면 그 음흉한 것이 득달같이 달려나와 덮치지 않을지. 잠시 평화로운 이 순간이 혹여 포식자가 아직 시장기를 느끼지 않아서 유예된 시간은 아닌지 감지할 일이다.

긴장을 풀 수 없겠지만 지레 겁먹을 일도 아니다. 며칠이나 굶었는지 몰라도 거미 입장에서도 먹이를 눈앞에 두고 섣부르게 행동할 수는 없다. 어떤 싸움에서든 하루치 양식이 걸린 자와 목숨이 걸린 자의 차이가 얼마나 극명한지 잊으면 안 된다.

걸려들었다고 당황하여 몸부림칠수록 그물은 옥죄어 온다. 갈팡질팡이란 단어는 금물이다. 일단은 숨죽이고 상황을 살펴야 하는데 저 검은 것은 시작부터 너무 버둥거린다. 등 딱딱한 저 곤충의 사투가 헛되지 않으려면 이제는 하늘의 손길이 있어야나 가능할 정도로 줄에 얽혔다. 구원의 밧줄 같은 외부의 힘이, 그것만이 살려낼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면 내가 잠시 그 밧줄일 수 있을까. 걸린 자를 완력으로 풀어주어 먹이틀을 설치한 주인을 굶길 것인지, 불운의 곤충을 사지에 버려두고 돌아설 것인지. 하지만 내겐 그 어느 쪽을 선택할 권한도 심판할 자격도 없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있어도 있는 게 아니다.

박정하다 해도 관찰자로서는 각자 생존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저들의 행보를 지켜보거나 외면하거나 할 따름이다. 그 무겁다는 삶과 죽음이 한낱 가벼운 거미줄에 얹혀 휘청거린다. 거미줄이라는 덫은, 자신이 걸려들기 전까지는 다가가 보고픈 아름답고 신비로운 예술작품일 수 있다. 모든 유혹의 손길이 그렇듯이 거미줄은 부드럽고 나긋하다. 허기와 조바심을 누르고 몸을 숨겨 먹이를 바라보는 거미의 여유가 세상 어느 불빛의 유혹보다 더 섬뜩하다. 손을 뻗는 곳이 그의 밥줄이고 허리 펴는 곳이 그의 쉼터다. 오늘도 이름만 다른 유형 무형의 거미줄이 도처에서 손짓하며 유혹한다.

‘의심하라/ 모오든 영광을’.

<김영수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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