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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악산책] 덩 덕 쿵덕덕, 흥보가

2022-03-11 (금) 손화영 (가야금 연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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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43 년 영국 소설가 찰스 디킨스가 쓴 소설 ‘크리스마스 캐럴’에는 고약한 구두쇠 영감 스크루지가 등장한다. 스크루지는 고리대금업자로 남들에게 인정사정없고 인색하기 짝이 없는 수전노이다. 그는 자신의 사무실에서 일하는 직원을 착취하고, 성격 좋고 올곧은 마음씨를 지닌 자신의 조카는 가난뱅이라고 조롱하며 무시한다. 찰스 디킨스를 유명한 작가로 만든 이 소설은 당시 영국 사회 문제를 비판하고 있다. 이 소설의 주인공 스크루지는 구두쇠의 대명사가 되어 현재에도 구두쇠를 스크루지 같다고 표현하기도 한다.

“에라, 이 놀부 같은 놈”

서양에서 구두쇠를 스크루지 같다고 표현한다면 한국에서는 욕심 많은 사람을 고전소설 흥부전에 나오는 욕심 많고 고약한 심보를 지닌 놀부를 빗대어 부르곤 했다.


“… 사람마다 오장이 육본디 놀보는 오장이 칠보라. 어찌허여 칠본고 허니 왼편 갈비밑에가 장기궁짝만허게 심술보 하나가 딱 붙어 있어 본디 심술이 많은 놈이라. 그 착한 동생을 쫓아낼 양으로 날마다 심술 공부를 허는 디 꼭 이렇게 허든 것이었다.”

소리꾼이 구성진 목소리로 사설을 읊으며 시작하는 판소리 흥보가는 첫 대사부터 참 재미있다. 오장육부가 아닌 심술보가 달린 오장칠부라니 말이다. 욕심 많은 놀보(놀부)를 일컫는 대목이다.

어느 날 무능한 동생이 일확천금하였다. 요즘으로 치자면 로또에 당첨된 것이나 다름없다. 잔뜩 눈엣가시 같던 동생인데 세상 사람들은 착하디착해 복을 받았다고 말한다. 아니나 다를까 심술보가 갈빗대에 하나 더 달린 놀보는 배가 아파 죽을 지경이다. 그 착한 동생을 쫓아낼 양으로 날마다 못된 심술을 부리다 마침내 결실을 보았는데 말이다. 흥보 놈에게 밤이슬을 맞고 다닌 것이면 포졸들에게 신고해 버리고 농문 열쇠 광문 열쇠를 빼앗아 버리겠다 겁박하는데, 순진한 흥보는 부러진 제비 다리를 고쳐주고 금은보화를 얻은 것이라 말한다. 놀보 놈은 가만히 듣더니 “야 거 부자 되기 천하에 쉽구나. 너는 한 마리 분질러서 부자가 되었거니와, 나는 한 열댓 마리 분질러 보내면 거부 장자가 될 것이야.” 그날부터 제비 딱지를 수천 개 만들어서 삼지사방에 붙였더니 집이 동편으로 쓰러졌겠다. 놀보가 아무리 기다려도 제비가 안 오니 죽을 제비가 들을 리가 있으리오. 하루는 기다리다 못해 그물을 들어 메고 제비를 후리러 나간다. 심술보 그득하다 못해 재물 앞에 부모 형제 없는 이기적인 이놈은 참으로 부지런하기까지 하다.

“제비 몰러 나간다 / 제비를 후리러 나간다 / 이때 춘절 생각 / 하사월 초파일 / 연자 나비는 펄펄 / 수양 버들에 앉은 꾀꼬리 / 제 이름을 제불러 / 복희 씨맺은 그물을 / 에후리 쳐들어 메고 / 제비를 후리러 나간다.”

현재 전승된 흥보가의 가장 오래된 더늠, ‘놀보 제비 후리러 나가는 대목’의 일부이다. 더늠이란, 판소리에서 명창이 자신만의 독특한 방식으로 부르는 대목으로 대중적 인기가 높은 작품일수록 많이 개발되었다. 흥보가는 판소리 다섯 마당 중 더늠이 가장 적지만 제비 후리러 나가는 대목이야말로 비정한 놀보의 심성과 모습이 희극적으로 잘 묘사된 유명한 것 중 하나이다. 권선징악의 절정으로 치닫기 위한 전조로서 관객은 너도나도 ‘덩 덕쿵덕덕쿵쿵덕쿵 쿵’ 중중모리장단에 빠져든다.

어려운 백성과 형제라도 힘없고 가난한 동생을 괄시하는 못되고 욕심 많은 형 놀보와 아무리 벌고 노력해도 가난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착한 동생 흥보를 주제로 한 흥보가는 세 시간에 달한다. 권선징악, 인과응보를 내용에 담고 형제의 우애를 교훈 삼아 강조하지만 놀보를 통해 조선 후기 자본주의를 꼬집으며 흥보를 통해 무능한 양반에 대해 풍자를 한다. 서민의 빈곤과 슬픔을 웃음으로 승화시킨 서민 이야기의 대표작품이다.

판소리사 초기부터 불린 작품으로 추정하는 흥보가는 조선 중기에 노래했으나 조선 후기 문헌 ‘관우희(觀優戱)’에 처음 등장한다. 흥보가 이야기는 여러 설화에서 그 모티프를 가져왔고 지리적 배경이 ‘충청, 전라, 경상, 삼도 어름’으로 제시되는 등 민담의 성격을 띄고 있다. 이 민담의 틀 안에 아무리 품을 팔아도 가난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사람과 풍부한 재물을 가지고도 욕심으로 남을 해치면서 나날이 불리는 재물 등 당시의 모순된 사회를 꼬집는다. 하지만 한민족이 지닌 선한 가치관에 따라 결국은 시니컬한 웃음 끝에 선한 이를 복 받게 하고 악을 벌한다.

흥보가에는 좋은 소리가 많다. “중 나려온다”로 시작하는 중이 흥보집에 동냥 온 대목부터 집터 잡는 대목, 제비노정기와 박 속에서 사람과 금은보화가 가득 나온다는 환상적인 설정으로 당대 하층민의 부에 대한 소망에 대한 보상을 보여주는 박타령, 그리고 비단타령과 가난타령, 놀보의 화초장 타령과 제비 후리러 나가는 대목 등이 그렇다. 소리꾼은 음률이나 장단에 의존하지 않고 일상적 말투로 아니리를 풀고 이어지는 창을 통하여 긴장과 이완을 반복하며 관객을 울리고 웃긴다.

흥보가는 제비라는 매개체를 통해 권선징악을 실현하는 등 비현실적인 내용을 담고 있지만, 한편으로는 생활고에 시달리며 가난하게 살아가야만 했던 민중들의 소망을 담아 현실과 상상을 적절히 섞어 재미있게 풀어낸다. 어려운 서민의 삶의 응어리를 놀보라는 무지막지한 양반을 벌함으로 해소하고 자신과 같은 처지의 흥보에 공감함으로 큰 대중적 인기를 끌게 된 것이다.
갖은 재담과 해학을 담아 긴 한마당이 지루할 틈 없이 눈 깜짝할 사이에 풀어내는 동편제 흥보가이다.

<손화영 (가야금 연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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