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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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기는 기적을 불러 온다’

2022-03-07 (월) 옥세철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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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한 미군 고급장교가 극동지역 순방길에 오른다. 여행 목적은 볼셰비키 혁명 후 내전에 빠져든 러시아의 국내 상황을 살피는 것이었다. 그 일정에는 한국방문도 포함돼 있었다.

일제강점 하에 놓여있던 당시 한국은 세계인들의 시야에서 사라진 망각지대였다. 그가 한국에 도착한 날은 그 해 6월 25일. 한국 땅에 발을 디딘 순간 충격적 상황을 목도하게 된다.

3.1 만세운동이 발생한지 세 달이 지났지만 일제의 총칼에 맞서는 한국인들의 피의 투쟁은 거리, 거리에서 계속되고 있었다. 그 광경을 그는 현장에서 직접 목격했다. 충격 속에 깊은 감명을 받은 그는 목격담을 따로 일기에 기록해 놓았다.


이 미군 장교의 이름은 윌리엄 도노반이다. 1차 대전의 영웅인 그는 2차 대전 발발과 함께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의 부름을 받는다. 1941년 7월 11일 영국의 비밀정보국(M16)을 모델로 한 미국 최초의 통합정보기관이 설립되면서 그 수장으로 발탁된 것이다.

정보조정국(Office of the Coordinator of Information- COI)이 그 통합정보기관이다. COI는 다음 해 특수공작정보기관인 전략첩보국(Office of Strategic Service- OSS)으로 개편된다. 그리고 전후인 1947년 OSS는 대대적 개편과 함께 중앙정보국(CIA)으로 거듭난다.

죽음으로 의연하게 일제의 총칼에 맞섰던 한국인들, 20여 년 전의 그 기억을 그는 결코 잊지 않고 있었다. 그 기억은 바로 OSS의 대(對)일본작전의 중심 개념으로 자리 잡는다. ‘한국인들을 반일 레지스탕스 전선에 끌어들여 대대적인 후방교란작전을 전개 한다’는 구상이다.

이와 함께 OSS는 중국의 항일전선에서 싸우고 있는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전폭 지원한다. 광복군 특수요원 훈련을 직접 맡는 등 적극적인 개입에 나선 것이다.

일본 본토가 마침내 타격거리에 들어왔다. 도노반 장군은 이와 발맞추어 한국인 특수공작원들을 한반도에 투입하는 작전계획에 착수한다. 그 계획은 중국전구(戰區)에서는 대한민국임시정부 광복군과 연계된 독수리작전으로, 태평양전구에서는 미주의 한인을 훈련시켜 투입하는 냅코작전(Napko-Naval Penetration of Korea- Project)으로 구체화된다.

한국인 특공대들의 한반도 투입 D-데이는 1945년 8월 26일로 정해지고 8월 들어 냅코작전 요원들은 오키나와로 이동해 대기하고 있었다. 그 정황에 라디오에서 돌연히 일본 천황의 떨리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1945년 8월 15일 무조건항복을 한 것이다. 한국침투작전은 불발로 끝났다.

이야기가 길어진 건 다름이 아니다. 한 민족의 생존에 있어 결국 중요한 것은 명예와 용기이고, 특히 용기는 때로 기적을 불러오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비록 소중한 자유를 되찾으려고 피로 저항하던 이름 없는 한국인들의 모습. 그 기억은 역사적 비운과 함께 과거사의 한 단편으로 화석화되고 말았지만.


“역사가 가속도를 내면서 불가능이 갑자기 가능으로 바뀌었다. 두 주 전만 해도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변화가 무서운 속도로 펼쳐지고 있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침공. 그 상황에서 벌어지고 있는 기적 같은 사태와 관련해 인권운동가 앤느 애플바움이 한 말이다.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 어린 아이 팔 비틀기. 세계 2위의 군사력을 자랑하는 러시아군의 우크라이나침공과 관련해 나온 비유였다. 동시에 나온 전망은 서방세계의 분열과 함께 미국 주도의 자유민주주의적 규칙에 따른 국제질서는 종말을 맞는다는 것이었다.

상황은 정반대로 전개되고 있다. ‘푸틴의 도박은 완전 실패로 돌아갔다.’ ‘푸틴은 전투에 이길 수 있어도 전쟁은 이미 졌다.’ 여기저기서 나오고 있는 진단이다.

반면 자유민주주의 진영은 무서운 속도로 결집되고 있다. 경제논리에만 집착, 망설이던 독일이 180도 궤도수정과 함께 적극적인 러시아제재에 나섰다. 그뿐이 아니다. 자유를 위해 용전분투하고 있는 우크라이나로 달려가고 있는 세계 각국의 자원용병이 수 만 명에 이르고 있다. 그 가운데 25년 만에 열린 유엔특별 총회에서 193개 회원국 중 141개국이 러시아 규탄 결의문 채택에 동참했다. 반전도 이런 반전이 없는 것이다.

무엇이 불러온 대역전인가. 자유를 지키기 위해 맨몸으로 싸우다 시피하고 있는 우크라이나 국민들의 고결하고 용감한 모습이다. 그 가운데 단연 빛을 발하고 있는 것은 비열한 푸틴과 극명히 대조되는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의 민주적 리더십이다.

“죽는 것이 두렵다. 그렇지만 대통령으로서 나는 죽음을 겁낼 권리가 없다”며 초췌하지만 활기찬 모습으로 국민과 하나가 돼 싸우고 있는 그의 모습은 전 세계적인 거룩한 분노의 거대물결을 일으키고 있다. 한 지도자의 용기, 민주주의에의 헌신은 기적을 불러오고 있는 것이다.

우크라이나가 피로 자유에의 항쟁을 벌이고 있는 그 타이밍에 치러지는 한국의 대통령 선거. 무슨 역사적 함의를 지니고 있을까. 불현 듯 떠오르는 질문이다.

‘중요한 것은 명예이고 용기다’ 답은 이 말에 함축돼 있는 것은 아닐까. 한마디로 난정에, 폭정이었다. 선출된 권력이 민주주의를 내파 시켰다. 그 절정은 초법적 특권층의 발호였다. 조국사태와 울산시장 부정선거 등.

그 불의한 권력에 한 강골 검사가 칼을 빼들었다. 청와대를 비롯한 180석의 거대여당, 친정부 언론에, 시민단체들. 그 무시무시한 세력에 필마단기의 자세로 싸우는 그 모습. 결국 민심이 움직였다. 윤석열 신드롬이 형성된 것이다.

그 용기는 기적을 불러왔다. 한국의 법치주의가 죽지 않고 되살아났다. 이와 함께 정권교체는 시대정신이 된 것이다. 그런 면에서 2022년 대선은 ‘윤석열 드라마’로, 3월 9일은 자유 민주주의 세력의 승리로 그 드라마가 영광의 대미를 장식하는 날이 될 것이라는 강한 예감이다.

<옥세철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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