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다림의 끝
2022-02-19 (토)
최동선 수필가
마침내 기다리던 눈이 왔다. 그러나 막상 눈이 내리자 그토록 눈을 기다리던 마음은 눈 속에 묻혀 버렸다. 어쩌면 정작 기다린 것은 눈이 아니라 오지 않을 사람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아내와 무작정 길을 나섰다. 2시간 남짓 운전해 뉴욕 인근의 철새 도래지에 도착 하고서야 그곳이 우리의 목적지였음을 깨닫는다. 철새는 보이지 않았고 철새를 기다리던 강은 여전히 무심하게 흐르고 있었다. 철새가 보이지 않아도 허허롭지 않은 것은 우리처럼 철새를 보러 온 몇몇 사람들의 상기된 얼굴에서 같은 기다림을 보았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사실 한 계절을 보내기 위해 수 천 마일을 항해한 철새에 비하면 우리의 기다림은 아주 미약한 몸짓에 지나지 않을 것이었다.
아내는 보이지 않는 철새 찾기를 포기하고 철새가 둥지를 틀던 흐트러진 갈대밭을 사진에 담았고, 나는 그런 아내의 모습을 무심한듯 바라보았다. 그 때 저만치 앞서가던 노인이 발걸음을 멈추고 주저앉았다. 멀리서도 위태롭게 앉은 노인의 작은 떨림이 느껴졌다. 우리는 서둘러 노인에게 다가갔고 도움이 필요한지를 물었다. 노인은 대답하는 대신 두 손에 감싸 안은 어린 새의 주검을 내보였다. 노인의 눈에서 안타까운 마음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주름살이 깊게 패인 노인의 얼굴은 온 생애를 정직하게 살아온 이의 수고로움이 훈장처럼 새겨져 있었다. 어느새 주변을 거닐던 사람들 몇몇이 모여들었다. 노인이 자신을 도와줄 수 있는가를 물었고 아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린 새를 도토리 나무 아래에 묻어 주고 싶다며 강가에 있는 나무를 가리켰다.
멀지 않은 강을 바라보며 살아온 도토리 나무가 보였다. 부러진 마른 가지를 내 뻗은 채 서 있어서 마치 죽은 듯 보였으나 해마다 가을 끝 무렵에 어김없이 도토리를 쏟아 내며 살아 있음을 알리는 나무였다. 아내는 그녀의 사진에서 멋진 모델이 되기도 하고 때로는 쓸쓸한 배경이 되기도 했던 그 갈대밭의 터줏대감인 도토리 나무의 안위를 늘 궁금해했다. 폭풍이 지나간 후 쓰러지지 않았기를 바라며 이 곳에 온 적이 있을 정도였다. 그럴때 마다 나무는 편안하지도 위태롭지도 않게 늘 같은 모습으로 강을 보고 서 있어서 안도했었다. 강을 보는 것인지 철새를 기다리는 것인지 알 수 없었으나 나무의 기다림은 살아감의 이유 일거라고 믿게 되었다.
노인의 부탁을 받는 우리는 제법 굵은 나무가지를 주워 와 땅을 파기 시작했다. 언 땅에 작은 구멍을 만드는 일이 쉽지는 않았으나 노인이 두 손에 어린 새를 감싸 안고 기다리고 있었으므로 포기할 수가 없었다. 땅 속에 작은 둥지를 만들고 낙엽을 깔아주어 새가 쉴 수 있는 자리를 만들었고 주변에 있던 아이들은 주워 온 작은 돌을 올려 돌무덤을 만들었다. 노인과 인사를 나누고 길을 나섰으나 마음은 편치 않았다. 뒤를 돌아보니 노인은 그 자리에서 망연히 하늘을 바라보고 서 있었다. 안쓰러운 마음과 그 상황을 벗어나고 싶은 마음이 뒤엉켜 불편했으나 빠른 걸음으로 갈대밭을 벗어나 다시 뒤를 돌아보니 노인은 여전히 도토리 나무 아래에 작은 점으로 남아 있었다.
우리가 집을 비운사이 눈 위로 사슴 발자국이 어지럽게 찍혀 있었다. 그 발자국을 따라가다 문득 지난해 늦가을에 어린 전나무를 옮겨 심은 기억이 떠올랐다.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벤치 옆에 쌓인 눈을 손으로 헤쳐보니 초록이 선명한 어린 나무가 서 있었다. 순간 나도 모르게 ‘아’ 하는 탄성을 내질렀다. 어디선가 우리집 정원으로 날아온 작은 씨앗이 싹을 내민 것도 신기했는데, 이 자리에 옮겨져 와 겨울을 견디고 있으니 살아 있는 모든 것이 신비롭게 느껴졌다. 한참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문득 어린 생명에게도 기다림은 ‘깊은 갈증일까 아니면 처연한 생존일까’ 궁금했다. 기다림이 그러하듯 서로 배타적인 가치가 교차하는 순간이며 또 다른 가치가 공유되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이기도 했다. 어쩌면 기다림은 다크 초콜릿 같은 거 인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며.
많은 사람이 머물렀고 지나갔던 길 위로 더 많은 새로운 사람들이 지나쳐갈 것이다. 어떤 이는 새 소리를 들을 것이고 또 어떤 이는 듣지 못할 것이다. 가끔은 느린 걸음 속도가 삶의 속도마저 늦추어 순간속에 살게 할지도 모르겠다. 여전히 바람위로 눈이 내리고 다시 그 위에 내 발자국으로 길을 만든다. 이 길의 끝은 어디일지, 또 기다림의 끝은 어디일지 궁금해지는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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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동선 수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