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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 에세이] 공평한 세상

2022-01-31 (월) 천양곡 정신과 전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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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사는 곳으로 이사 온 후 두번째 맞는 겨울이다. 나는 생각지도 않은 겨울철 앨러지로 고생이 심하다. 콧물, 재채기에 눈이 가려워 밤잠도 설친다. 알고 보니 시다 나무에 핀 꽃가루가 원인이다. 앨러지 없는 사람들이 많은데 왜 나는 앨러지로 고생을 해야 하는지 불평이 나온다. 오래 전의 한 환자가 생각난다.

“이봐요, 의사 선생, 세상 공평하지 않군요. 되게 나빠요.” 20대 후반 남자의 볼멘소리다. 대답은 “그래요, 그러니 그러려니 하고 사세요.”이지만 환자에게 그렇게 말할 수는 없다. 그의 장점을 들춰내서 용기와 희망을 갖도록 도와주어야 된다.

환자는 시카고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계절성 앨러지 건초열(Hay fever)로 시달렸다. 시카고는 8월 말부터 9월 말까지 기후가 제일 좋다. 그 좋은 날씨에 앨러지 때문에 밖에 잘 나가지도 못했다. 주사도 정기적으로 맞고 다른 치료방법을 사용해봐도 효과가 없었다. 그래서 고교 졸업 후 캘리포니아로 가서 대학을 다녔다. 대학 마친 후 좋은 직장 얻고, 대학에서 만난 여성과 결혼하여 딸도 하나 얻었다.


그런데 아내가 산후우울증이 너무 심해 딸을 데리고 시카고의 처가로 돌아갔다. 몇 달 지나 산후우울증세가 많이 좋아졌는데도 아내는 그 곳에서 살고 싶다고 했다. 그는 딸이 하도 보고 싶어 할 수 없이 이직 신청을 하여 시카고로 돌아왔다. 그러나 행복하지 않았다. 더구나 앨러지 때문에 너무 괴로웠다. 캘리포니아로 다시 가자고 사정해도 아내는 막무가내였다. 어느 날 화가 치밀어 술김에 아내에게 손찌검을 했다. 가정폭력자로 경찰에 끌려간 후 감옥에 가든지 아니면 정신과의사의 치료 받든지 선택하라는 판사의 명령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공평’이란 누구든 차별 없이 고루 평등하다는 것이라고 사전에 적혀있다. 그러나 사람 사는 곳에는 반드시 차별이 존재한다. 피로 맺어진 가정 안에서도 차별이 있다. 공평한 세상이 없기에 우리는 공평한 세상을 더 원하는지도 모른다. 타인의 경험과 객관적 감정보다 주로 자신의 주관적 감정과 경험에 의해 공평과 불공평이 결정된다.

공평하지 않다는 불평을 환자들로부터 자주 듣는다. 왜, 자기가 정신병 환자가 되었는지 하는 부정, 분노의 감정이 섞여있다. 실은 환자뿐 아니라 우리 모두 가끔 그와 비슷한 말을 한다. 그러나 세상의 불공평에 대해 눈을 감아버리고, 공평하다는 한숨 섞인 착각 속에서 살아간다. 역사학자 유발 하라리는 저서 ‘사피엔스’에서 이렇게 말했다. “호모 사피엔스가 지구촌 생태계의 최강자로 먹이사슬의 꼭대기로 올라간 이유는 존재하지도 않은 상상 속의 많은 것들을 존재한다고 믿게 만드는 능력” 때문이다. 인간을 위해 세상이 공평하다는 착각 속에 살아가도록 만들어놓았다. 그게 생존을 위해 필요하고 우리 마음을 평안하게 해주기 때문이다.

우리는 세상을 혼자 살아가지 않는다. 누군가와 무엇과 어울려 살다보면 억울하거나 공평하지 않은 일을 당할 때가 있다. 그러나 그게 우리의 삶이다. 먼저 불공평함과 불공정함에 버틸 수 있는 내적인 힘, 용수철처럼 다시 원래 상태로 돌아올 수 있는 오뚝이 같은 뚝심을 길러야한다. 그 다음에 세상은 불공평하지만 아직도 미래에 대한 희망과 가능성이 있다는 확신을 갖는 게 중요하다.

다음 한국 대통령으로 유력한 두 후보의 국민적 호감도가 별로다. 공평, 공정을 말로만 하지 말고 누가 대통령으로 당선되든 한국이 공평한 사회가 될 수 있다는 희망을 심어주어야 한다. 그게 해외동포들의 새해의 바람일 것이다.

<천양곡 정신과 전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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