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시인 로버트 프로스트의 시 ‘담장 고치기(Mending Wall)‘에 보면 ‘담장이 튼튼해야 이웃 사이가 좋아진다(Good fences make good neighbors)’라는 구절이 나온다.
오늘 칼럼에선 20세기 초 유럽 이민자들이 미국에 들어오려면 첫 번째로 거쳐야하는 관문, 이민국 건물이 오랫동안 자리하여 유서 깊은 뉴욕 허드슨 강 하구 엘리스 섬(Ellis Island)의 담장에 관한 얘기를 나눠본다.
흔히 미국의 역사라고 하면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영국에서 건너온 청교도들이 건국을 주도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그 내막을 한 꺼풀 벗기고 들어가 보면 영국 왕으로부터 칙명을 받은 신하나 식민지 개척회사들이 미 동부해안선을 따라 초기 식민지 건설에 깊이 간여했다.
1609년, 이른바 대항해 시절 영국 탐험가 헨리 허드슨은 유럽 열강의 동인도회사 중 선두그룹인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소속으로 ‘반달호’를 타고 맨해튼 섬 서쪽의 허드슨 강을 거슬러 현 뉴욕주의 수도 알바니까지 탐험했다. 이를 계기로 뉴욕과 뉴저지 일대에 ‘뉴 네덜란드’라는 식민지가 건설되었다. 그러나 뉴 네덜란드는 영국과의 전쟁으로 1664년 영국의 손아귀에 넘어갔고, 당시 영국의 국왕 찰스 2세는 이 땅을 자신의 동생 제임스 2세에게, 제임스 2세는 다시 그 일부를 자신의 충복 버클리 경과 조지 카트렛 경에게 하사했다. 이때 하사한 땅의 동쪽 경계를 ‘바다와 허드슨 강’이라고 애매하게 표기한 게 1차 분쟁을 잉태한다.
이처럼 서류상의 경계 담장이 튼튼하지 못했던 탓에 뉴욕과 뉴저지주는 독립전쟁이 끝나기가 무섭게 영토분쟁에 휘말렸다. 특히 수상무역의 요충지였던 허드슨 강은 당시 주의 재정수입에 막대한 영향을 미쳤기 때문에 두 주 모두 순순히 물러설 입장이 아니었다. 뉴욕주는 대서양과 허드슨 강을 경계로, 뉴저지주는 허드슨 강의 중간 지점을 주의 담장이라고 각각 주장했다. 그 분쟁영토 목록 가운데 상인 겸 농부 ‘사무엘 엘리스’가 소유한 3에이커의 섬도 포함되었다. 이게 바로 현재 자유의 여신상이 위치한 리버티 섬에서 800m 떨어진 엘리스 섬이다.
수십 년간 이어진 지루한 분쟁 끝에 1829년 1차 소송이 제기되었으나 1834년 뉴욕과 뉴저지는 물밑 협상을 통해 허드슨 강과 뉴욕만 중앙을 두 주의 경계로 하되 뉴욕이 강 전체를 독점적으로 관할하고, 엘리스 섬 역시 뉴욕이 갖는 것으로 합의했다. 이후 엘리스 섬은 미 육군이 포병 진지로 개축하여 사용하다가 19세기 후반부터 맨해튼에서 대대적인 지하철 공사가 시작되며 나온 흙을 매립하여 원래 3에이커에서 27.5에이커까지 면적이 늘어나게 되었다.
이렇게 확장된 땅에 연방정부는 유럽에서 오는 이민자들의 수속을 위해 이민국과 이민병원 등을 설치했다. 이곳 입국심사장을 통해 1892~1954년까지 62년간 1,200만여 명의 이민자가 아메리칸 드림을 품고 거쳐갔다. 이후 유럽 이민자의 감소로 이민국은 폐쇄되었지만 섬의 활용방안 검토과정에서 간척사업으로 확장된 땅의 소유권 문제가 또 불거져 2차 담장분쟁이 시작됐다. 뉴저지는 1834년 두 주의 경계선 합의에 따라 확장된 지역이 허드슨 강 중앙에서 서쪽 뉴저지 쪽에 있기 때문에 자기들 것이라고 우기고, 뉴욕은 자신들의 섬에 간척사업을 통해 새로 생긴 땅이니 뉴욕 소유가 되어야 당연하다고 맞대응했다.
1998년5월26일 엘리스 섬을 둘러싼 상고심에서 대법원은 6대3의 판결로 ‘1834년 두 주의 합의에 따라 당시 뉴욕의 소유였던 3에이커는 뉴욕주, 이후 간척사업으로 얻어진 24.5에이커는 뉴저지주의 소유’라고 담장을 정리해주었다. 대법원이 법의 권위를 빌어 두 이웃의 담장을 사이좋게 고쳐준 판례이다.
<
손경락 변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