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3년 3월5일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은 취임 후 첫 업무 지시로 전국 은행에 나흘간 휴업 명령을 내렸다. 대공황의 공포 속에 전국 곳곳에서 뱅크런(한꺼번에 예금을 인출하는 현상) 사태가 벌어지자 내린 특단의 조치였다. 다행히 대규모 은행 파산 위기는 넘겼지만 국민들의 불안감은 가시지 않았다. 그로부터 일주일 후 루스벨트는 라디오 생방송을 통해 은행의 작동 원리를 차분하게 설명한 뒤 “정부를 믿고 은행에 돈을 맡겨 달라”고 호소했다. 그 유명한 ‘노변정담(fireside chat)’이다. 대통령의 말은 기적을 일으켰다. 시민들이 은행 재개에 나서면서 3월 말 전국 은행의 75%가 영업할 수 있게 됐다. 1944년까지 이어진 노변정담은 대공황을 극복하고, 미국인을 하나로 모은 원동력이 됐다. 미국 유일의 4선 대통령인 루스벨트는 미국인들이 가장 존경하는 대통령 중 한 명이다.
근래 국내 정치에 루스벨트가 자주 소환되고 있다. 지난 10월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 후보는 “국가 주도의 강력한 경제 부흥 정책으로 경제성장률 그래프를 우상향으로 바꾸겠다”며 “대공황을 이겨낸 루스벨트에게 배우겠다”고 외쳤다. 기본소득을 설파할 때도 “소수의 개인과 대기업의 횡포에 맞서 정부의 권위를 세워 분배의 정의를 실현하고 미국 복지의 토대를 마련했다”며 루스벨트의 명성을 빌려왔다.
문재인 대통령 역시 2012년, 2017년 대선 당시 가장 존경하는 인물로 루스벨트 전 대통령을 꼽았고 올해 5월 방미 중에는 루스벨트기념관을 찾아 ‘한국판 뉴딜’ 성공을 다짐했다. 한국에선 뉴딜이 경제 부흥의 상징 언어로 자리를 잡은 까닭이다. 노무현 정부(뉴딜적 종합투자), 이명박 정부(녹색 뉴딜), 박근혜 정부(스마트 뉴딜)에 이어 문재인 정부(한국판 뉴딜)까지 뉴딜은 수식어만 달리한 채 계보를 잇고 있다.
뉴딜의 핵심 정책인 정부의 시장 개입과 부의 재분배 등은 당시 “사회주의 국가에서나 가능한 포퓰리즘”이라는 비난을 들었다. 뉴딜 자체는 효과를 못 보다가 제2차 세계대전 발발로 미국이 군수 공장 역할을 하면서 경제 도약의 발판을 마련했다는 분석도 있다. 뉴딜 정책에 빛과 그림자가 공존하지만 분명한 것은 국민과 솔직하게 소통하고, 반대파를 설득하기 위해 애쓴 지도자가 있었다는 사실이다. 역사학자인 제러미 수리는 루스벨트의 성공 비결로 “언제까지 무엇을 해내겠다는 약속을 하지 않았고, 조만간 사태를 해결할 수 있다는 ‘희망 고문’도 하지 않았다”고 짚었다. 대신 ‘할 수 있다’는 자신감과 ‘우리’라는 일체감을 미국인에게 심어줬다고 평가했다.
‘한국판 뉴딜’을 외치는 대한민국을 돌아보자. 존경하는 인물로 루스벨트를 꼽은 대통령은 취임사에서 “광화문 대통령 시대를 열겠다”고 약속했지만 구중궁궐에 틀어박혀 ‘가장 소통하지 않는 대통령’이란 기록을 세우게 됐다. 입버릇처럼 ‘위대한 우리 국민’을 칭송했지만 위기 땐 도통 보이지 않다가 위대한 국민들이 위기를 넘기면 슬그머니 나타나 자화자찬을 쏟아낸다. 조국 사태, 윤미향 사태, LH 사태, 대장동 사태 등으로 이어진 부패와 무능의 진흙탕 속에서 희망의 정치는 자취를 감췄고 그 자리를 절망과 분노가 채웠다.
정치 혐오가 임계점을 넘어선 가운데 20대 대선이 정확히 83일 앞으로 다가왔다. 여야 대선 후보들이 경제 위기 극복과 사회 취약 계층 지원 등을 최우선 과제로 내세운 만큼 차기 정부에선 또 다른 수식어를 붙인 뉴딜로 수렴될 것이다. 하지만 루스벨트가 보여줬던 설득과 공감의 리더십을 찾긴 어렵다. 심지어 일부 후보에게선 섬뜩한 전체주의의 그림자마저 엿보인다. 아이러니하게도 루스벨트 재임 기간 대서양 건너편에선 히틀러의 나치 광풍이 휘몰아쳤다.
“우리 세대가 저지른 잘못 때문에 오늘날 어린이들에게 열 살 땐 팬데믹을, 스무 살 땐 독재를, 서른 살 땐 기후 재앙을 차례로 겪게 하는 건 너무도 부당하다.” 여든을 내다보는 세계적인 석학(자크 아탈리)의 근심이 그저 노학자의 기우로 그치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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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민정 서울경제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