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마다 12월에 들어서면 버릇처럼 오 헨리의 단편 ‘마지막 잎새’를 반추하며 애수의 눈물을 흘리곤 했다. 아마도 고교시절 무렵이었을 것이다. 한 소녀 환자가 꺼져가는 자기의 생명을 창밖의 나무 마지막 잎새 하나가 떨어질 때까지를 한계상황으로 그려놓은 글이다. 그 나무 잎사귀는 바로 아래층에 살고 있던 어느 노 화가가 소녀를 격려하기 위해 몰래 그려 붙여놓은 잎이었다.
올해도 어김없이 찬바람 불어 을씨년스러운 겨울이 찾아왔다. 12월 마지막 남은 달력 한 장이 눈 비바람에 애처롭게 시달리고 있는 ‘마지막 잎새’처럼 감성을 흔들어대면서 오래 전의 추억들과 올 한해의 수많은 회한들이 함께 밀려와 나를 압도해버린다.
올 한해를 나는, 아니 우리 모두는 어떻게 살아왔는가. 코로나가 탈을 바꿔 써가며 온 인류에게 옐로카드를 쥐어주고 여차하면 레드카드를 내밀 기세다. 코로나의 분노를 모두가 전혀 눈치조차 채지 못하고 다시 1년을 보내온 우리가 아니었나.
존 밀턴은 17세기에 이미 ‘실낙원’을 통하여 인간사회의 타락과 부조리와 탐욕 등으로 낙원이 사라진 비참한 그리고 깊숙한 지옥의 늪을 고발하였다. 밀턴은 실명 후에 실낙원을 쓰며 눈으로 본 세상이 아니라 마음으로 본 세상을 썼으리라.
여기에 같은 시각장애인 상황에서 밀턴의 주장에 주제넘게도 한 줄을 덧붙이고 싶다. 우리들이 뱀의 꼬임에 빠져 원죄를 짓고 이 고뇌의 땅으로 추방당한 것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가 악을 좋아하여 선악과를 맛있게 따먹고 다시 악이 그리워 낙원을 뛰쳐나와 사탄의 세계로 뛰어내린 것이라는 억지 주장 말이다. 갑자기 오늘을 함께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에게 질문 하나를 던진다. 올 한해 우리는 선했고 양심적이었던가를, 그리고 증오, 시기, 질투, 저주, 탐욕의 어리석음이 없었던가를 자문자답해 보라고 권한다.
석가모니는 극락에 도달하려면 방하착(放下着)을 수련하라고 가르쳤다. 모든 천한 것, 소유 욕망이 모두 다 죄업이니 모든 것을 포기해야 무념의 경지에 들 수 있고 그것이 극락(낙원)이라는 것이다. 예수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라고 계명했다. 자기를 희생하고 이웃을 위해 헌신하는 것이 모두가 어려운 일, 좁은 문이다. 그 좁은 문을 택하는 것이 바로 진리이다. 돈을 움켜쥐고 벌벌 떨며 어려운 고통받는 사람 도와주지 못하는 것은 진리도 아니고 자유도 아니다. 우리는 올 한해 동안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진리를 택하고 자유로웠는지 함께 반성해보자고 권한다.
해가 바뀌는 어귀에 서서 새삼 시간의 개념을 명상해본다. 시간이란 인간의 편의대로 짜놓은 엄혹한 규정 아닌가. 그냥 산간계곡에 흐르는 물처럼 소리 없이 정처 없이 흘러가는 구름처럼 살면 됐지 구태여 시간이라는 틀 속에 매달려 아등바등 헛스윙, 헛발질로 삶을 낭비하지나 않았는지 반성이 앞선다. 지나가는 세월에 대한 반항인가보다.
그러나 올 겨울도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12월의 정감이 알 수 없는 흥분을 일으키고 있다. 어쩔 수 없는 인간으로서의 갖가지 사연 깊은 추억들과 있을 법한 미래의 꿈을 그려본다.
올해 따라 유난히도 정겨움에 더해 서글프게, 또 더하여 신묘하게 참으로 오랜만에 찾아온 ‘마지막 잎새’의 감회가 나만의 12월을 현란하게 장식하고 있는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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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용 전 한민신보 발행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