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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콜 클래식] 삶과 교향악

2021-12-03 (금) 이정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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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감상을 하다보면 무의식적으로 교향곡(symphony)을 좋아하게 된다. 물론 사람마다 성향의 차이는 있지만 매년 FM 클래식 방송국 등이 실시하고 있는 조사에 의하면 인기 신청곡 10위 안에 드는 작품 중 교향곡이 무려 5작품이나 차지하고 있는 것을 보면 인류의 교향곡 사랑은 매니아층, 대중을 가리지 않고 폭넓은 계층을 형성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나의 경우도 그동안 써 온 글 중 교향곡이 차지하는 비율이 1백 작품 중 3분의 1에 해당하는 35개 정도인 것으로 파악됐다. 왜 교향곡일까? 그것은 아마도 교향곡이 어떤 진지한 맛이랄까, 철학성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심각하다고해서 모두 위대한 음악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아무래도 인생이라는 것이 대체로 슬프고 불행한 일을 많이 겪기때문에 이를 극복하고자 하는 마음에서 종교나 음악에서의 교향곡 등이 탄생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쇼펜하우워는 인간은 불가항력적으로 세상에 내던져진, 가장 불행한 존재지만 음악은 그러한 인간을 구원해 준다고 했다. 물론 음악은 일시적이기 때문에 보다 궁극적인 구원을 위해서 사람은 각자 (종교적인) 노력과 철학 등이 더 필요한지도 모르겠지만 음악이 피안으로 향하는 훈풍인 것만은 사실인 것 같다.

역사상 최고의 교향곡은 어떤 것이 있을까? 수년 전 영국 BBC 방송국이 지휘자 150여명을 상대로 조사한 바에 따르면 역사상 가장 위대한 교향곡으로 선정된 작품은 베토벤의 교향곡 3번(영웅)이었다. 5위까지의 곡들을 살펴보면 2위에도 역시 베토벤의 교향곡 9번(합창), 3위에는 모차르트의 교향곡 41번(주피터), 4위에는 말러의 교향곡 9번, 5위에도 역시 말러의 교향곡 2번(부활) 등이 랭크되어 있었다. 놀라운 것은 말러의 작품이 10위 안에 무려 3곡이 올라 있어 이는 베토벤의 2곡 보다도 많은 숫자를 기록하고 있다는 점이다. 10위 안에 복수 교향곡을 올린 사람들은 말러와 베토벤, 브람스가 유일한데 아이러니한 것은 브람스는 단 4개의 작품 밖에 남기지 않았지만 모두 20위권 안에 들었고, (20위권 안에는) 베토벤이 5작품, 부르크너와 모차르트 등이 각각 2작품씩 그 이름을 올렸다. 그러면 이 글을 쓰고 있는 저자가 좋아하는 최고 심포니는 어떤 것이 있을까?

개인적으로 음악은 영감이 중요한 예술이라고 생각한다. 역사상 영감이 가장 충만했던 작곡가로서는 모차르트가 꼽힌다. 머리로 생각했다기 보다는 바디의 율동이라고나할까, 몸이 먼저 나가고 충만한 끼로 정신없이 작곡해 나갔던 모차르트. (물론 이런 모차르트조차도 어마어마한 노력이 이를 뒷받침했다고 알려지고 있지만) 아무튼 이런 모차르트에 한번 빠지면 헤어나는데 오랜 시간이 걸린다고 한다. 그러나 이런 모차르트조차도 교향곡에 이르러서는 그 위상이 다소 달라진다. 너무 가볍다고나할까, 어딘가 철학적 빈곤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 모차르트의 한계라면 한계였다. 그나마 단조로 시작되는 교향곡 40번이 그 단점을 보완하고 있는 최고의 교향곡 중의 하나로 꼽히고 있는 것이 아이러니라면 아이러니. 교향곡하면 뭐니뭐니해도 베토벤과 말러를 꼽는다. 베토벤은 말하기를 작곡가로서 ‘신의 광채를 인류에 뿌려주는 일만큼 벅찬 감격도 없다’고 했다. 여기서 광채란 음악을 말하는 것으로 베토벤은 음악을 신에게 다가가는 일로 비유했다. 말러는 ‘나의 날은 반드시 온다’고 했다. 즉 말러 또한 음악을 어떤 계시라 생각했고 자신의 예언이 언젠가는 실현되리라고 믿었다. 말러의 음악이 신의 계시였는지는 모르지만, 아무튼 말러의 예언은 적중했고 요즘 21세기에는 말러의 음악을 모르면 음악을 안다고조차 할 수 없다. 각종 음악회나 유튜브 등에는 말러 연주가 넘쳐나고 있고 대중이든 지휘자이든 말러에 사족을 못 쓰고 있다. 그러면 말러의 어떤 면이 사람들을 홀리고 있는 것일까? 그것은 아마도 말러의 음악이 너무도 처절한 슬픔을 간직하고 있기때문은 아닌지 모르겠다.

통상 비애는 인간을 슬픈 감정으로 이끌기도 하지만 동시에 놀라운 치유를 안기기도 한다. 슬픈 음악이 아름다운 것인지, 아름다운 음악이 슬픈 것인지 인간은 잘 알지 못한다. 말러는 자신의 어린 딸이 5살까지밖에 생존하지 못하고 사망했을 때 자신 역시 15명이나 되는 형제 중 간신히 살아남았기 때문에 크게 슬퍼하지도 않았다고 한다. 말러 또한 51세에 심장병으로 사망했지만 베토벤이 그랬듯 말러 역시 자신의 유전적 질병과 가족들의 불행을 음악으로 승화시킨 의지의 소유자였다. 그래서인지 말러의 교향곡 3번 등을 듣고 있으면 누구나 감상적이 된다. 삶에는 언제나 죽음이 있고 이별이 있고, 형언할 수 없는 아픔이 있다. 인생이 무(無)로 느껴질 때… 우리는 어쩌면 (말러의 교향곡들처럼) 교향곡에 진지해질 필요가 있을지 모르겠다. 한(恨)으로서 恨을 승화시켜가는 실존적 모습이랄까… 가을에 떠올리는 교향악들은 그래서 더욱 더, 스러져가는 영혼을 위한 신의 선물로 다가오곤 한다.

<이정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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