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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악산책] 시대를 반영한 신라 가요

2021-11-12 (금) 손화영 (가야금 연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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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미국 뉴욕시의 일간지 뉴욕타임스(NYT)는 ‘BTS 부터 오징어 게임까지, 한국은 어떻게 문화 강국이 되었나’ (From BTS to ‘Squid Game’: How South Korea Became a Cultural Juggernaut)라는 제목의 기사를 실었다. 최근 넷플릭스를 통해 전 세계를 강타한 한국 드라마 오징어 게임 흥행에 한국의 문화가 다른 문화와 언어 장벽을 넘어 자리 잡게 된 배경을 조명한다. NYT의 기사에 따르면 자동차와 스마트폰으로 널리 알려진 한국이 현재는 엔터테인먼트 산업에서 세계인을 사로잡게 되었고 이러한 성공은 하룻밤 사이에 일어난 것은 아니라고 분석한다.

최근 세계에서 불고 있는 K 열풍의 성공에는 많은 요인이 있지만, 시대적 내용을 독자적인 감각으로 잘 담아 소통했기에 가능했다. 비록 언어도 문화도 다르지만, 동시대를 살아가는 세대의 비슷한 삶의 고민을 담고 사회적 이슈에 대해 목소리를 내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고대 한국도 크게 다르지 않았는데 당시 유행하던 민간 가요는 시대적 내용을 담았다. 국악이라고 하면 대부분 조선시대 음악을 떠올린다. 하지만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한민족은 2~3세기경 이미 악기를 제작해 연주했다는 것을 사료를 통해 알 수 있다. 현재의 대중음악과 같은 민간음악은 삼국시대에도 널리 성행했다. 신라시대에 버스킹이 존재한 것처럼 말이다. 거리공연을 뜻하는 버스킹(busking)은 길거리에서 연주한다는 의미의 버스크(Busk)에서 유래된 용어로 거리에서 자유롭게 공연하는 것을 말한다. 버스킹하는 공연자를 버스커(busker)라 부르는데 버스커들은 악기와 마이크 등을 들고 다니며 거리에서 음악 공연을 행하며 관객과 소통한다.


신라의 버스커는 ‘거사’라는 명칭으로 불렀다. 자료에 따르면 당시에는 거사라 부르는 민간 예술인이 많았는데 주로 승려의 의복을 입고 악기를 가지고 여러 지방을 다니며 연주 활동을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삼국유사에 8세기경 젓대(대금) 연주자이자 명창인 월명과 향가 명창인 영재의 예술이 소개되는데 거사와 같은 민간 예술인들의 적극적인 음악활동 덕분에 신라 후기 민속 음악과 극음악은 빠르게 발전할 수 있었다. 향가는 우리나라 고유의 노래 또는 우리말 노래로 보통 신라부터 고려 초기까지의 노래를 말한다.

승려와 화랑을 포함한 다양한 계층이 향가를 노래했으며 불교, 정치, 민요, 주술 등 다양한 성격의 내용을 담았다. 신라 후기에는 주술적 내용보다는 시대적 내용을 많이 담았는데 젓대나 가야금, 향비파와 같은 선율 악기를 동반한 세련된 고급 음악으로 발전한다. 불합리한 당대의 현실을 비판한 민요가 창작되고 신라 전기의 향가가 다양한 음악 형태로 발전했다.

신라 후기에는 민요를 노동생활과 결부된 노동요로서 불렀다. “거북아, 거북아? 수로 부인 내놓아라”로 시작하는 ‘해가’는 바다의 용이 수로 부인의 미모를 탐내어 납치했을 때 백성을 모아 노래를 지어 부르고 막대로 언덕을 쳤더니 해룡이 부인을 내놓았다는 설화이다. 납치된 수로 부인의 무사 귀환을 기원하는 점에서 주술성을 지니고 있으나 이전의 노동요와는 달리 시대상을 반영한 민요가 탄생한 것이다. 단순히 터무니없는 초월적 주술에 의존하는 것이 아닌 여러 사람이 힘을 합하면 어려운 일도
해결할 수 있다는 상부상조의 의미를 담았다.

신라 거사인 월명은 향가 ‘도솔가’를 지어 불렀는데 불교적인 내용과 더불어 주술과 역시 시대적인 내용을 포함한다. 기록에 의하면 당시 하늘에 해가 둘로 나타나 열흘이 지나도록 없어지지 않았는데 월명이 도솔가를 지어 재앙을 면하게 하였다는 설화가 있다. 9세기 후반 처용이 노래한 향가 ‘처용가’ 역시 당시의 세태를 반영한다. “동경 밝은 달밤에 / 밤늦도록 놀고 지내다가 / 들어와 자리를 보니 / 다리가 넷이로구나 / 둘은 내 것인데 / 둘은 누구의 것인고 / 본디 내 것이다만 / 빼앗긴 것을 어찌하리” 신라 헌강왕 때 노래와 춤에 뛰어난 처용이 밤늦게 돌아와 역신이 자신의 아내의 아름다운 용모를 흠모하여 동침하는 것을 보고 부른 노래이다. 처용가에는 남녀간의 도덕을 중히 여기던 당시의 사상이 반영되어 있다. 이때 화내지 않고 처용가를 노래하고 춤춘 처용에게 감동하여 역신은 처용의 형상을 그린 것을 문 앞에 붙이는 것만으로 그 문 안에는 들어가지 않겠다고 약조하였고, 이후 사람들은 처용의 형상을 문에 붙여 역신을 쫓았다고 한다. 다소 허황한 내용일 수도 있으나 이러한 설화에 바탕을 둔 환상적인 내용의 노래는 민간에서 널리 불리며 발전하였다. 향가는 고려 전반기 시조와 가곡 음악 발생의 기초가 된다.

경주 지방을 중심으로 민요와 깊은 관계를 띄며 발전한 향가는 삼국유사에 수록된 14편의 향가 중 11편이 신라 후기에 창작되었다. 민요보다 세련된 형식을 띠며 가사의 운율과 억양에 따라 4구체, 8구체, 10구체의 형식으로 노동요나 민요, 귀신을 막기 위한 주요, 사랑 고백 등을 그 내용으로 하는데 순수 우리말로 불렀다. 현재는 삼국유사에 전해지는 14편의 향가와 더불어 균여전에 수록된 11편의 향가만이 전해지지만 시대를 담은 신라 가요로부터의 민간 가요 발전은 오랜 역사를 거치며 우리만의 독자적인 문화의 근간이 되었다.

<손화영 (가야금 연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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