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한 가을이 찾아와/ 초소처럼 서 있던 생선가게에 불이 꺼지고/ 선착장을 날던 드론들도 사라져/ 만년 시계인 양 긴 불면에 드는 모래둔덕/ 가문 좋은 금속들만 시간의 페달을 유유히 달리는….”
본보 ‘이 아침의 시’ 집필자로 플로리다에 거주하는 임혜신 시인이 쓴 시 ‘베라, 나는 아직도 울지 않네’의 일부분이다. “이상한 밤이 찾아와/ 철 늦은 소금장미 들창에 피어나고/ 러시아풍 선술집에서 젖은 럼향기 풍겨올 때/ 나, 베라를 생각하네”로 이어진다.
올해 ‘제6회 동주해외작가상’을 수상한 임 시인은 최근 한국에서 같은 제목의 시집을 출간했다. 2001년 ‘환각의 숲’ 이후 20년 만에 펴낸 두 번째 시집이다. 동주해외작가상은 계간 ‘시산맥’과 동주문학상제전위원회가 윤동주의 ‘서시’에 담긴 시 정신을 구현하기 위해 제정했다. 총 4부로 구성된 이 시집에는 60여 편의 시가 담겼다.
임 시인은 “이번 시집은 통렬하고 감미로운 이국적 토속의 토포필리아”라고 소개했다. 토포필리아는 장소를 뜻하는 희랍어 토포(Topos)와 사랑이라는 의미의 필리아(Philia)가 합쳐진 단어로, 어느 장소에 대한 정서적 유대를 뜻한다.
그는 시 창작에 대해 “삶의 고단한 행로가 배태한 ‘녹슨 총구’를 닦아 숲의 상상력처럼 빛나는 ‘흰 눈꽃’의 이미지를 발양하는 것”이라며 “삶의 내포적 진실을 반사하는 거울과 같은 것이며, 사소하고 보잘것없는 여로의 모래밭에서 사금을 걷어 올리듯 소중한 실과를 수확하는 작업”이라고 정의했다.
문학평론가인 김종회 전 경희대 교수는 이번 시집에 대해 “‘가장 아름다운 십자가’, ‘시골 다방은’, ‘시간이라는 전차를 타고 그곳에 가면’, ‘토포필리아’ 등 시집에 수록된 시는 박학다식과 박람강기의 시적 언술과 묘사로, 활달한 언어의 성찬을 펼쳐 보이고 있다”고 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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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은선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