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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한인여성의 역할

2021-11-03 (수) 주동완 코리안리서치센터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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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7년부터 2010년까지 미국에서 발표된 재미한인에 관한 학술적인 연구 논문은 총 499편이다. 이 499편의 학술논문들의 제목에 사용된 단어 중에서 사회학적으로 의미 있는 어휘는 여성(Women)이 56회, 노인(elderly)이 32회, 소기업을 의미하는 비즈니스(business)가 28회, 자녀(children) 25회, 정체성(identity) 23회 그리고 갈등(conflict)이 22회 등으로 나타났다.

특히 여성이란 어휘의 빈도수가 가장 많이 사용된 것은 여성이 재미한인 이민사회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으로 인식되고 있으며, 그만큼 여성들이 재미한인 이민사에 끼친 영향력이 크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재미한인 이민사회의 형성과 발전에서 한인 여성들이 크게 기여한 시기는 세 번의 시기로 나누어볼 수 있다. 첫 번째 시기는 사진신부 시기다. 1903년 1월13일 갤릭호부터 1905년 8월8일 몽골리아호까지 총 56회에 걸쳐 7,291명의 조선인들이 하와이 사탕수수밭 농장의 노동자로 이주했다. 이들 가운데 80%이상이 성인 남성이었으며 상당수가 미혼이었다. 조선인 남성들은 고된 하루의 노동을 끝내고 숙소로 돌아오면 술과 노름 그리고 싸움으로 하루를 마감하곤 했다.


이러한 숙소내의 문제 해결과 생산성 향상을 위해 농장주들은 조선 여성들을 사진신부로 데려왔다. 1910년부터 1924년까지 약 1,000명 정도의 조선 여성이 배우자의 사진만 보고 결혼하기 위해 미국에 입국했다. 배우자들과 평균 15년의 나이 차이가 있었던 사진신부들은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가정을 꾸리고 하와이 한인사회를 안정시키고 한인 커뮤니티를 형성 및 발전시키는데 커다란 역할을 했다. 나아가 조선의 독립을 위한 활동에도 많은 역할을 했다.

두 번째 시기는 미군신부 시기다. 미군신부는 한국전쟁이 끝난 뒤인 1950년대 중반부터 1970년대에 걸쳐 주한 미군들과 결혼을 통해 미국에 입국한 여성들이다. 이들은 흔히 ‘기지촌 여성’이라고 해서 한국에서도 사회적으로 멸시를 받은 경우가 많았다. 약 10만 명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되는 이 여성들이 미군과 결혼하여 먼저 미국에서 자리 잡은 후 1965년 개정이민법에 의해 한국의 부모형제자매들을 이민 초청했다. 이 여성들 덕분에 많은 한인들의 미국 이민이 가능해졌고 미국 내 한인 인구의 증가와 함께 오늘날 미국 도처에 있는 코리아타운이 형성될 수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가정적으로 또는 미주 한인사회에서조차 외면당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던 것이 안타까운 현실이었다.

재미 한인사회에서 한인 여성들의 역할이 컸던 세 번째 시기는 네일업의 번성 시기다. 네일업은 1980년대부터 한인 여성들이 중심이 되어 시작되었고, 1990년대부터 크게 증가했다. 현재 뉴욕 메트로폴리탄 지역에만도 약 5,000여 개의 네일 업소 중 3,000개 정도가 한인 업소로 추산된다. 네일업은 한인 여성들의 사회경제적 지위를 크게 향상시켜주었을 뿐만 아니라 한인들의 주력 업종의 하나가 되어 한인사회의 경제력 증진에도 적지 않은 기여를 했다.

이처럼 120년 가까운 재미한인 이민사에서 한인 여성들은 각 시기별로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 2000년 이후부터 한인사회 내에 홈케어 서비스의 증가와 더불어 이에 종사하는 한인 여성들이 지속적으로 증가하고 있다. 홈케어 서비스가 재미한인사회에서 급부상하는 새로운 직업분야이므로 이에 종사하는 여성들이 한인사회를 다시 한번 발전시키는 네 번째의 역할을 할지 지켜볼 일이다.

<주동완 코리안리서치센터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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