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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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 안부를 묻습니다

2021-10-30 (토) 최동선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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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달 이때 쯤 나무 끝으로 묻어 나오는 가을을 보고 국화를 사들고 왔었다. 아직 꽃망울도 다 여물지 못해 설 익은 풋사과 처럼 파란 잎으로 쌓여 있던 국화는 그렇게 그날 부터 우리집 현관 을 지키며 조금씩 꽃잎을 열었다. 출근길에 겨우 눈도장이나 찍는것이 미안해서 간혹 비오는 날에는 현관앞 계단 아래쪽으로 내려 놓아 비라도 실컷 맞게 하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국화를 사들고 들어 올 때는 가을이 가는 여정을 담담히 적어봐야 겠다고 생각했는데 겨우 두 줄을 쓰고는 빈 공백으로 남아 있는 노트가 책상 구석을 지키고 있을 뿐이다. 사는 것이 바빴다고 애둘러 변명을 해보지만 나는 또 다시 놓쳐버린 가을의 심상을 가슴에만 담아 두어야 할것 같다. 돌이켜 보면 그 놈의 가슴은 깊은 바다여서 늘 갖지 못한것을 담기만 했었다. 언젠가 이 세상을 떠나면 바다에 닻을 내리고 담아 두었던 묵은 것들을 하나씩 풀어 내며 마음껏 울고 싶다.

자고 나면 먼 산이 한걸음씩 마을 쪽으로 내려왔다. 밤 사이로 산이 내려오면 그 뒤로 가을이 바짝 따라 내려 왔다. 지난 밤 비에 하늘 아래 세상은 더 빠르게 가을의 점령군에 포위되었고, 땅도 사람도 가을빛으로 물들였다. 붉게 타들어 가는 나무잎이 모두가 꽃이 되었고, 그 꽃나무가 늘어선 아름다운 거리를 서성인다. 꽃이 된 나무 아래에 멈춰 선 노란 버스에서 어린 소녀가 내렸고 엄마로 보이는 젊은 여자가 아이를 보고 환하게 웃었다. 이내 아이는 깡총 깡총 뛰어가 엄마 품에 안기고, 순간 젊은 엄마와 아이가 꽃으로 피어났다. 가을은 신비한 마력이 있어 가을이 닿는 순간 모두가 꽃이 되었다.

가을은 지극히 평온해 보이는 마을에도 내려왔다. 늦은 저녁까지 학교 운동장에서 농구를 하던 사내 아이들이 보이지 않는다. 사내 아이들의 땀냄새와 환호가 단조로운 마을에서는 꽤나 괜찮은 볼거리 였는데 가을이 운동장까지 내려온 이후에는 아이들이 보이지 않았다. 아이들이 떠난 자리에는 가로등만이 서둘러 내려온 어둠을 쫓으며 서 있을 뿐이다. 바람이 제법 차다고 느꼈고 그대 건강하냐고 안부를 묻고 있었다. 늘 잊고 있었던 그대를 불현듯 생각해 낸 것 만으로도 가을 한 복판에 서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더 이상 내 손으로는 쥘 수 없는 그 무엇들, 지나갔다고 생각해도, 혹여 그만 놓쳐 버렸다고 마음 다잡아도, 아니 그저 잊어버린 것이라고 생각을 바꾸어도 마음은 그저 허허롭다. 늘 이즈음에서 오는 상실감은 왜 치유되지 않는 것일까. 아니 치유를 원치 않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흔들려 본 적이 있었던가, 그렇게 아파했던 적이 있었던가, 사는 것이 바빠서 꽃을 꽃으로 보지 못했고, 바람을 바람이라 생각하지 못해 잠시 쉬어가지도 못했었다. 가을은 되돌아 온 길을 돌아보게 하는 까닭에 서러워서라도 흔들리고 싶다. 분해서라도 아파해 보고싶다. 처음으로 돌아가는 것은 내 삶에 지친 때문이기도 하지만 실은 처음이 그리워서 돌아가는 것이다. 기차길 옆의 작은 외갓집과 시장통 안채에서 9식구가 살던 그 옛날로 돌아가고 싶다. 하루를 벌어 하루를 살았음을 어른이 되어서야 알았지만 생선 두마리로 아홉식구가 나누어 먹던 그 오래된 옛날에는 부족함이 없었다. 가난이 전부였으나 부끄러워 하지 않았었다.

누구에게나 가을은 온다. 어쩌면 내 삶에서 가을의 시간을 보내고 있는 것이라 생각이 들어 더 조바심을 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돌이켜 보면 가을에는 그저 마음을 내려 놓으면 되었다. 있던 자리에서 그대로 서서 오는 가을을 바라보다가 감당할 수 없을 만큼 허허로우면 가슴에 품으면 되었다. 가슴은 큰 바다여서 품지 못하는 것이 없었고, 가슴에 품으면 세상이 보였다. 있는 그대로를 바라보는 것이 가을 보기였다. 외로우면 외롭다 말하고 화가 났으면 화가 났다고 말하면 되었다. 기쁘면 마음껏 웃고 홀로 있고 싶으면 홀로 있어도 되었다. 처음 보았을 그 때처럼 그대를 귀하게 생각하고 아무리 노력해도 부족한 나 자신은 부족한대로 받아 들이면 되었다.

평화로운 주말에 슈만의 ‘트로이 메라이’를 조성진의 피아노로 듣는다. 선홍색의 국화꽃잎 사이로 바람이 지나간다. 바람이 싣고 온 쓸쓸함마저 내것인 양 받아들이다가 국화꽃마저 없었더라면 가을은 얼마나 더 서러웠을까 생각했다. 국화꽃 너머로 그리운 얼굴이 맑갛게 떠오른다. 문득, 그대의 안부가 궁금했다. 넘어가는 노을과 함께 가을이 깊어가고, 어디선가 들릴 듯 말 듯 벌레 울음소리가 들린다.

<최동선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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