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너는 그렇게 나에게 오고

2021-10-23 (토) 김영수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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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내 집에 오게 된 건 글쎄, 그게 우연이었을까. 꽃가게에서 너를 처음 봤을 때, 네 이름이 낯선 영어로 적혀있어도 꽃이 없어도 한련(旱蓮)이라는 걸 한눈에 알아봤어. 모종 철이 지나자 처분하려고 한구석으로 모아놓은 너희는, 구겨진 철사줄처럼 서로 엉켜서 너희 본연의 가치를 잃고 있었어.

살까 말까. 괜히 가져다가 살리지 못하면 어쩌나 하면서도 연잎을 닮은 너의 잎에 끌렸어. 네 이름에 연꽃 연(蓮) 자가 들어 있는 게 이 잎 때문이구나 하며 내 손은 너와 네 친구 둘을 골랐지. 혼자는 외로울 것 같았어.

보이지는 않아도 네 줄기 속에 감춰진 아주 작은 꽃망울이 내 마음을 잡고 흔들더구나. 초록 뒤에 숨은, 꽃을 올리려는 안간힘을 본 거야. 나는 잠시 흔들렸지. 너라면, 네가 흔드는 거라면 흔들리고 싶었어. 그때 콩알만 한 꽃망울이 또 하나 보인 거야. 다시 한 번 흔들. 그래 흔들어보렴. 나는 그 흔들림에 기꺼이 몸을 맡기고 싶었어. 엄마 등에 업혀 다니며 아기 때부터 익숙해진 흔들림, 그 따스하던 기억 때문이지. 고국을 떠나 살다보니 태평양 건너 불어오는 바람만큼 포근한 바람도 없더구나.


놀랍게도 그 순간, 그러니까 내가 바람을 느낀 순간 주황색 꽃 세 송이가 너희 몸에서 깨어나는 거야. 아주 천천히 하나씩, 다큐멘터리 영상에서처럼 피어났어. 믿어지지 않지? 꽃 앞에 서서 보고 있는 나도 내 눈을 의심했으니까. 이게 가능한 일일까. 염력(念力)이라 하기엔 너무 비현실적이어서 멍하니 서 있을 수밖에 없었어. 그런데 정말 꽃이었어. 똑같은 주홍색 한련화.

네 몸의 가느다란 줄기가 꽤나 길다는 걸 알고 어린아이 다루듯 조심스레 차에 실었어. 우리 집 뒷마당에 도착하여 네가 물어본 첫 질문이 뭐였는지 생각나니? 그날이 기억나느냐는 거였어. 그날이라니? 처음에는 그게 무슨 말인가 했지. 그 말을 신호 삼아 거짓말처럼 그때 풍경이 열렸고 나는 기억 속 시간으로 들어갔어. 그리고 너의 전생이라고밖에 할 수 없는 그곳에서 너를 다시 만났단다.

어느 한정식집 마당이었어. 한옥을 개조하여 만든 그곳은 정갈했고 여느 음식점답지 않게 한가했어. 예약 손님만 받는 곳이었거든. 햇볕이 내려앉는 안마당 양편으로 소담한 꽃들이 자연스럽게 도열해있었지. 자연스럽다는 건 가꾸지 않아 제멋대로였다는 의미야. 그 방만한 흐트러짐에 마음이 평화로워지는 아이러니를 너는 이해하겠지.

하지만 나는 눈길 줄 겨를도 없이 일행을 따라 안으로 향했어. 한지를 발랐던 문을 유리문으로 갈음한 것에 시선을 두며 댓돌에 구두를 벗으려다 돌아본 마당. 구석진 한 켠에서 뭔가 나를 붙드는 게 느껴졌어. 저게 뭐지? 한련?

맞아. 한련화. 그런데 그 꽃들이 자리한 터가 소 여물통이라는 걸 나중에서야 알아차렸어. 어른 양팔 길이쯤 되는 아름드리 통나무 속을 파낸 거였어. 왜 하필이면 소 먹이통이었을까. 하지만 정작 내 마음을 잡은 건 소 밥그릇이 아니라, 주홍빛 낭창거림 속의 당당하고도 자유로운 몸짓이었어. 같은 줄기에서 핀 같은 색 꽃인데도 제각각 다른 곳을 바라보며 바람결에 하늘거리는 한련의 자유로움.

같은 방향을 바라보며 사는데 익숙한 나였거든. 가족과 친구와 동료와, 아니 생판 모르는 사람들과도 향하는 방향이 다르지 않았어. 나만 다른 곳을 보면 왠지 불안하고 뭔가 잘못된 것 같았지. 꽃도 그렇잖아. 다들 해바라기를 하며 같은 곳을 바라보잖아. 나도 그랬어. 남들이 대학에 가면 나도 갔고 남들이 취직하면 나도 했고 남들이 그맘때쯤 결혼해 아이를 낳으면 나도 그래야 하는 줄 알았지. 다른 데를 바라볼 생각도 못했는데 한참 걷다 돌아보니 길은 하나가 아니라 여러 갈래였던 거야.

내가 학창시절로 돌아가면 제일 해보고 싶은 게 뭔지 아니? 금지된 일을 골라서 저질러 보는 거야. 놀랍지? 나 좋아하는 콘서트에 가느라 결석하고, 조퇴하여 금지된 영화도 몰래 보고, 아니다 싶은 어른에게 박박 대들어도 보고, 교복 치맛단도 돌돌 접어 올려 깡총하게 입고 다니고, 신나게 연애도 하고. 고작 그런 거냐고 하겠지만 그 당시에 그러기 위해서는 목숨 걸다시피 하고 혼자서 딴 데를 바라봐야 했거든. 무리에서 ‘혼자’가 된다는 것, 그건 두려움과 외로움을 동시에 짊어지는 일이더라. 타국에서 소수로 사는 일보다 더, 더, 훨씬 더.

네가 우리 집에 온 바로 다음 날 너는 내가 상상하던 꽃을 올렸어. 반갑다거나 기쁘다기보다는, 꽃집에서 네 몸 속 꽃망울을 상상한 게 아니라 내가 실제로 본 거였나 하며 혼란스러웠어. 환생한 것처럼 내 앞에 나타난 너를 보며 이게 정말 우연일 수 있을까 생각했지. 나에게 닿기 위해 그 멀리서 날아온 너를 말이야.

네 안에서 무엇인가가 깜빡였어. 너만이 낼 수 있는 빛이었지. 나도 내 감정에 솔직하며 변화무쌍하게 펼쳐지는 시간의 빛을 따라 나의 길을 걷고 싶었거든. 너처럼, 바람결에 춤추는 뜨겁고 자유로운 영혼으로 살고 싶었단 말이야. 너는 그렇게 나에게 왔단다.

<김영수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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