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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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에 할 말 있다

2021-10-11 (월) 배광자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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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북한에서는 남자 친구를 ‘남친’, 남편을 ‘오빠’라 부르는 것을 금하면서 대대적인 한국식 말투 단속에 나섰다고 한다. 장마당을 통해 암암리에 유통되는 한류 드라마를 보다가 ‘너구리 눈’이 된 젊은이들이 많기 때문이다. ‘너구리 눈’은 한국 드라마를 보다가 잠을 설쳐 눈이 퀭한 것을 가리켜 부르는 북한의 은어라고 한다. 북한 젊은이들이 남쪽 말투를 닮아가는 것에 체제의 위협으로 느낀 모양이다.

한국의 나이 든 세대도 남편을 오빠라고 부르는 것에 대해서 적잖이 거부감을 느낀다. 나의 남편은 TV를 보다 젊은 여자들이 자기 남편에게 “오빠, 오빠”하면, 채널을 홱 돌려버린다. 또 여자들이 남편을 아빠라고도 하니 요즘 촌수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르겠다며 “정작 자식들은 아빠를 뭐라고 불러야 하나?” 빈정댄다.

몇 년 전에 한국을 방문했을 때다. 카페에 가서 커피를 주문하니 “커피 나오셨습니다” 하고, 시장에 가서 배추 값을 물으면 “이 천원이십니다” 했다. 사물에 극존칭을 붙이니 너무 어색하게 들렸다. 병원에서 앉아 기다리다 차례가 되니 간호사가 “손님 들어오세요”라는 말을 “손님 들어오실게요” 했다. 그런 식으로 매사에 “…세요” 대신 “…게요” 라는 어미를 붙여 너무 이상했다.


그것만 해도 옛날 얘기다. 최근엔 영끌, 빚투, 본캐, 부캐 등 신조어들이 많다. 또한 줄임 말이 유행이다. 얼마 전 국민의 힘 당대표 경선 후보자들의 마지막 TV 합동 토론회 때였다. 젊은 이준석 후보가 ‘억까’라는 말을 사용했다. 나이 든 다른 후보들이 그게 무슨 말인지 몰라 어리둥절하고 있으니 이준석 후보가 눈치를 채고 ‘억지로 까기’라는 말이라고 부연 설명을 하는 것을 보았다.

요즘 젊은이들은 웬만한 말들은 거의 다 줄여서 쓴다. 배달 탕수육의 경우 ‘부먹, 찍먹’이라고 한다. 탕수육 소스를 부어 먹을 것인지 찍어 먹을 것인지를 결정할 때 쓰는 말이다. ‘내또출’은 ‘내일 또 출근’이라는 말이고 ‘알잘딱깔센’은 ‘알아서 잘 딱 깔끔하고 센스 있게’의 줄임말이라고 한다. 그뿐 만이 아니다. 한글 맞춤법이나 어법도 무시한다. ‘좋니’는 존니로, ‘꽃잎’은 꼰닙으로 소리나는 대로 쓴다. 또 ‘아주 맛있어, 정말 좋아, 매우 재밌어’ 대신 완전 맛있어, 완전 좋아, 완전 재밌어 등 거의 모든 말에 ‘완전’자를 붙인다.

외래어를 남발하는 것도 문제다. 근래 짓는 아파트 이름을 보면 레미안, 아크로, 자이 등 국적 불명의 외래어 일색이다. 건설사들이 아파트 단지명에 외래어를 써야 고급스럽게 느껴져 값이 많이 나가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우리 언어는 신조어와 줄임말, 막말 등으로 많이 파괴되고 거칠어졌다. 또한 고유의 우리말이 외래어와 뒤범벅이 되어 정체불명의 언어가 됐다.

“언어는 정신이다”라는 말이 있다. 언어가 의사소통을 넘어서 사람의 얼을 담는 그릇이라는 뜻이다. “말이 곧 그 사람이다”라는 말도 있다. 말에는 그 사람의 인격이 담겨있다는 의미다. 바르고, 품격 있는 말을 사용함으로써 오염된 우리말을 정화하고 되찾으려는 노력이 절실하다.

<배광자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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