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형철의 철학경영] 삶의 의미가 먼저다
2021-10-07 (목)
김형철 전 연세대 교수
엄청나게 더운 여름날이다. 땀을 뻘뻘 흘리면서 세 명의 인부가 일을 하고 있다. 첫 번째 인부에게 물었다. “당신은 무슨 일을 하고 있습니까.” “보면 모르시오. 지금 벽돌 나르느라 바빠 죽겠소. 도와주지 못할 바에는 방해나 하지 마시오.” 퉁명스러운 대답이 돌아온다. 두 번째 인부에게도 똑같이 물었다. 그랬더니 이런 답이 돌아온다. “나는 처자식 여덟 명을 먹여 살려야 합니다. 조금이라도 입에 풀칠하려고 이렇게 벽돌을 나르고 있습니다. 목구멍이 포도청이지요.” 세 번째 인부의 답은 좀 달랐다. “저는 사람의 영혼을 구제하는 위대한 성전을 짓는 중이랍니다. 그 위대한 일을 하는 데 조금이라도 보탬이 된다면 여한이 없습니다.” 누가 가장 행복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가. 당연히 세 번째 인부다. 이유가 무엇일까. 그가 가장 행복한 이유는 자신이 그 일을 하는 의미를 스스로 찾았기 때문이다.
수녀원의 수녀들은 자신의 재산 증식에 여념이 없고 권력을 향한 탐욕에 찌든 삶을 사는 속세와는 판이한 삶을 매일매일 살아간다. 수녀들이 하루 종일 하는 일은 대개 비슷하다. 먹거리를 마련하기 위해 씨 뿌리고 밭을 가는 육체적 노동을 신성시한다. 성경 공부를 열심히 하고 기도와 명상으로 영혼을 고양시킨다. 한 수녀원에서 있었던 일이다. 그곳에는 두 종류의 수녀들이 있었다. 한 부류는 좀 일찍 죽었고 또 다른 부류는 평균 10년 정도를 더 살았다. 도대체 삶을 살아가는 방식이 비슷한 집단에서 왜 이렇게 유의미한 차이가 나는 것일까. 비밀은 일기장에 쓰여 있었다. 수명이 더 길었던 수녀들이 젊은 시절부터 쭉 써온 일기장에는 공통점 하나가 발견된다. 하나같이 자신의 삶에 대한 고마움을 표현하고 있었다. 똑같이 힘들게 일하고 기도하면서도 감사하는 것과 그저 묵묵히 견뎌내는 것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 자기 삶의 의미를 찾은 사람은 오늘이 있음 그 자체에 감사해한다. 감사하면 즐거워진다.
2차 세계 대전 동안 가장 수난을 겪은 사람들은 단연 유태인들이다. 600만 명이 수용소에 갇혀 비참하게 죽었다. 매일매일 사람들이 가스실로 끌려가서 죽는다. 가스실로 끌고 가는 사람들 중에는 놀랍게도 같은 유태인들이 있었다. 더욱 놀라운 것은 그들을 가두고 가스실 단추를 누르는 사람들도 같은 유태인들이었다. 나치에 의해 부역자로 지명되면 임무를 수행하면서 좀 더 나은 음식을 먹을 수 있다. 그만큼 생명이 연장되기도 한다. 그러나 동시에 그 역할을 지목받으면 차라리 자살을 선택하는 유태인들도 여럿 있었다. 동족을 배신하면서 살아가느니 차라리 죽겠다는 것이다. 어차피 동족을 다 죽이고 나면 자신도 마지막으로 가스실에 들어갈 게 뻔했기 때문이다. 전형적인 토사구팽이다.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에서 있었던 일이다. 좀 특이한 행동을 하는 유태인이 한 명 있었다. 틈만 나면 유리조각 같은 것을 찾는다. 면도를 하기 위해서다. 수용소에 갇힌 유태인들은 기약 없이 죽을 날만 기다리고 있는 처지인데 그는 왜 매일 면도에 열중했을까. 그 유태인은 나치가 건강 상태가 좋아 보이지 않는 사람들을 먼저 골라 가스실로 보낸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다. 조금이라도 깨끗하고 건강해 보이면 생명을 연장할 기회가 생긴다는 판단을 한 것이다. 종전 후 그는 수용소에서 끝까지 살아남은 사람들을 인터뷰해 책을 한 권 냈는데 인터뷰 과정 중 이 사람들에게서 놀라운 공통점 하나를 발견했다. 그들은 자신이 반드시 살아서 수용소를 나갈 거라고 믿었던 것이다. 그리고 매일매일 ‘나가서 제일 먼저 무엇을 할 것인가’를 머릿속으로 상상하며 시간을 보냈다. 그 시간들이 너무나 재밌어서 시간 가는 줄 몰랐다. 그가 저서 ‘죽음의 수용소를 넘어서’를 쓴 빅터 프랭클이다.
“자신이 사는 의미를 아는 사람은 그 어떠한 고통도 참을 수 있다.” 독일의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가 한 말이다. 나는 오늘도 나 자신에게 묻는다. “나는 왜 이 삶을 살고 있는가.” 삶의 의미는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찾는 것이다. 의미를 찾으면 감사한 마음으로 삶을 즐길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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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철 전 연세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