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를 보던 남편 눈에 갑자기 눈물이 고인다. 예전엔 부부가 같이 앉아, 보지도 않던 멜로 스토리다. “당신 울어?” 와이프의 목소리에 놀림기가 묻어있다. 남편이 벌떡 일어나 키친으로 간다. 가을에 들면서 남편이 눈물을 보인 게 벌써 세 번째다. 부부상담에 나온 아내는 남편이 늙어간다고 말한다. “남자가 나이 들면 눈물이 많아진다죠? 가을이라 더 그런가요?” 아내가 묻는다. 답은 예스 앤드 노우. 노화도 있고 직장문제도 있고 자녀문제, 성 기능, 사회관계, 호르몬 변화, 거기에 가을이라는 계절 변수도 있다.
우울증은 상담실에서 자주 만나는 케이스 중 하나이지만 스펙트럼이 너무 다양해서 모든 사람을 ‘우-울’ 두 글자로 말하긴 어렵다. 누구에겐 불안이 따라오고 누구에겐 멜랑콜리아, 누구에겐 기분과 일치하는 망상이나 환각 같은 정신병적 양상, 혹은 기분과 일치하지 않는 정신병적 양상이, 그리고 때론 가을 같은 특정 계절에만 나타나는지 주의 깊게 살펴봐야하기 때문이다.
‘가을 탄다’를 임상심리에서는 길게 ‘계절성 동반 재발성 주요 우울장애’로 설명하기도 한다. 가을(사람에 따라 여름, 봄, 겨울 등 다른 계절을 타기도 함)만 되면 웬일인지 더욱 우울하고 만사에 흥미가 없어지는 기분을 반복적으로 경험한다. 가장 뚜렷한 증상으로는 도저히 어찌 해볼 수 없는 무력감,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기도 힘들고 눈을 뜰래도 절로 감겨서 계속 잠에 빠지는 과다 수면, 과식, 체중 증가, 탄수화물 땡김 등이 있다.
‘가을형’에 비해 ‘겨울형’은 나이가 어릴수록, 적도 부근보다는 북쪽으로 올라간 고위도 지역으로 갈수록 더 많이 나타나는 것으로 보고된다. 이를테면 플로리다에서는 유병률이 2% 정도지만 뉴잉글랜드 북쪽 지역에서는 10%까지 올라간다. 이밖에도 교대근무제 회사의 밤 근무자들, 낮에 햇빛 볼 시간이 적은 직업군도 위험도가 높아진다. ‘가을형’이 겨울로 접어들면서 증상이 악화되어 자살 시도에 이르기도 한다.
대체 햇빛이 뭐 길래? ‘가을 타기’의 원인을 신경생리학자들은 일조량에서 찾는다. 햇빛의 양과 햇빛 쬐는 시간이 너무 적을 경우, 에너지가 부족해지고 활동량이 줄어들며 못 견딜 슬픈 기분에 휩싸인다. 게다가 아무리 먹어도 차지 않는 느낌 때문에 과식을 하거나 과수면 같은 생화학적 반응을 불러온다. 뇌는 우리가 외부 환경에 잘 적응할 수 있도록 생체시계를 통해 조절을 해주지만 계절성 우울(SAD; Seasonal Affective Disorder) 환자는 이런 변화에 적절하게 대응할 능력이 떨어져 있다.
기미, 주근깨, 주름살은 어쩌라고? 햇빛이 걱정인 사람이라도 최소 하루 30분 이상 종합광선을 쬐면, 체내에 비타민 D가 만들어져 우울증과 싸울 세로토닌 양이 늘어난다. 지난 20년간의 일조량 관련 생리학 연구들은 같은 결과를 보인다. 매일 30분-2시간 동안 2천-1만 럭스의 광선치료를 1개월간 계속하자, 계절성 우울에 유의미한 효과를 보였다는 것이다. 평균적으로 일반 사무실은 1천, 정밀조립 5천, 햇빛은 10만 럭스 정도이다. 치료용 광선기도 시중에 나와 있다. 고가의 메디컬용 기기가 아니라도 100달러 미만의 가정용 떼라피 라잇 역시 추천할 만 하다.
계절을 타는 우울증은 여성이 남성의 4배, 10대 후반부터 일어나 20대까지 계속 증가한다는 게 미정신건강연구소의 통계이다. 계절변화가 우울로 이어질 때는 모쪼록 밖으로 나가야 한다. ‘멘탈은 피지컬로!’ 임상심리의 오랜 불문율이다.
<
김 케이 임상심리학 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