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북한, 단상

2021-09-27 (월) 장희은 / 과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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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 반공 포스터 대신 평화통일 포스터를 그리며 자랐던 세대로서, 내게 있어 북한은 평화통일이라는 거창한 단어만큼이나 멀고 막연한 이미지에 지나지 않았다. 2000년, 남북 정상이 악수하는 사진이 신문 1면에 대문짝만하게 실리고 모든 미디어에서 요란법석을 떨 때도 크게 기쁠 것도 없었다.

내가 북한을 새롭게 접하게 된 계기는 유학생으로 미국에 갓 나왔을 때다. 한인 2세인 대학원 동기가 북한 관련 다큐멘터리 상영회가 있다길래 별생각 없이 따라갔다. ‘서울 기차(Seoul Train)’라는 제목으로, 목숨을 걸고 북한을 탈출하는 탈북민들과 이들을 인생을 걸고 돕는 이들의 현실을 생생하고도 적나라하게 담은 내용에 내내 눈물 콧물을 쏟다가 나왔다. 처음으로 북한이라는 이름이, 그 안에 갇혀 살아가는 나와 똑같이 생긴 사람들이 가슴 아프게 다가오기 시작했다.

최근에 나온 ‘과학의 평화(A Peace of Science)’라는 백두산 공동 탐사를 비롯한 미국과 북한 과학자들의 교류를 다룬 다큐멘터리를 보았다. 참으로 고무적이다. 북한과의 민간 교류는 문화 예술이나 스포츠 정도가 익숙한데, 새롭게 과학기술 외교의 가능성을 조명한다. 실제로 남북간 농수산업, 산림, 보건의료, 에너지 및 기술산업 등의 분야에서 협력 가능성이 제기되어왔고 일부는 조금씩이나마 이루어져왔다. 단순 지원 사업이 아닌 공동 연구는 외교적 기후에 대한 민감성과 물리적 시간적 제약 때문에 쉽지는 않겠지만, 남북의 과학자들이 자유롭게 토의할 수 있게 환경만 마련된다면 분명 큰 시너지 효과를 낼 것이라 생각한다. 학생들끼리의 일일 학술대회도 좋은 방법이다. 젊은 과학도들이 같은 큰 주제를 놓고 상호작용하는 것만으로도, 다음 세대들이 지적으로 교류하고 나아가 통일 후 양쪽의 문화적 간극을 메우는 데에도 큰 도움이 될 것이다.

한국인의 창의적이고 우수한 유전자는 현재 한류라는 단어 아래 대중문화 예술을 이끌고 있고, 각종 분야에서 두루 세계적으로 빛을 발하고 있다. 동일한 놀라운 유전자를 가졌을 북한의 수많은 인재들이 그 잠재력을 꽃피울 기회조차 얻지 못하고 기아와 압제 속에 생존을 걱정하다가 생명을 마감하는 현실이 안타깝다. 북한에 속히 자유와 해방이 날이 오기를, 그리고 과학기술 분야에서의 민간 교류가 통일 전후의 과정을 더욱 부드럽게 하는 윤활유로 쓰일 수 있기를 소망한다.

<장희은 / 과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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