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아는 나, 다른 사람이 아는 나, 내가 바라는 나는 확실히 존재한다. 변하지 않는 본질적인 나, 진짜의 나, 진정한 나는 존재할까? 과학은 ‘없다’, 철학은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다’, 심리학과 종교는 ‘있다’고 한다. 신체 모습, 남자여자, 학력, 직업으로 나타난 외면의 정체성과 오감을 통해 느낀 지각적 경험을 벗어버린 내가 진짜 나일까, 누구나 한 번쯤 해보았을 물음이다.
물, 얼음, 수증기의 핵심 요소는 수소와 산소의 결정체이다. 수많은 원자로 이루어진 인간도 하나의 물질이므로 계속 분해하면 남는 것은 미세한 입자이기 때문에 실체는 없는 거라고 과학은 말한다. 그러나 심리학은 모든 인간이 태어날 때부터 동일하게 가지고 있는 이해, 사랑, 배려 등을 진짜의 나를 만드는 핵심 요인으로 꼽는다.
분노와 욕심으로 가득 찬 마음을 비우면 이미 그 속에 와있는 불성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어 자신과 하나로 될 때 진짜의 나를 찾게 된다고 불교는 가르친다. 기독교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이웃에게 행동으로 보여줄 때 진짜의 내가 된다고 한다. 즉 종교개념은 의식과 영혼이 성숙하여 창조주에 가까이 갈 때 비로소 진짜의 내가 나타난다는 것이다. 심리학 개념은 진짜의 내가 일단 형성되더라도 일생동안 불변은 아니라는 주장이다.
40대의 컴퓨터 엔지니어가 있었다. 이 남성은 직장에서 일이 잘 풀리자 자신이 신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생겼다. 그런 의심은 어려운 컴퓨터 프로그램이 큰 성공을 거두자 점점 확신으로 변해 스스로를 신이라고 믿게 되었다. 그는 이 사실을 누구에게도 말하고 싶지 않았다. 직장동료들, 친구들을 만날 때도 이를 감추기 위해 무척 겸손하려고 애썼다.
그리고는 어느 날 회식 후 얼큰히 취해 집에 돌아와 아내한테 자기가 신이라는 말을 했다. 천기누설을 범했던 것이다. 아내는 농담 말라며 웃어넘겼지만 그가 계속 신이라고 하는 말에 걱정이 되었다. 결국 정신과 의사를 만나 보라는 아내의 호소에 그는 할 수 없이 오피스 문을 두드리게 되었다.
정신증(Psychosis)은 현실사회와의 접촉과 연결이 잘 안 되어 현실파악 능력이 결핍된 정신상태다. 환각과 망상이 정신증의 주 요인이다. 하지만 극단적인 소수의 망상을 제외하곤 이상여부를 판단하기가 매우 까다롭다. 각 개인의 사고는 문화적, 사회적, 시대적 영향을 많이 받기 때문이다. 특히 종교와 관련된 망상은 단정하기가 매우 어렵다.
앞의 환자는 불신자로 교회나 절 문턱에도 가본 적이 없었다. 그는 과대망상증을 가진 정신질환자였다. 지금 그는 직장일과 사회생활에 큰 불편 없이 지내지만 시간이 지나면 세상 살아가기가 매우 힘들어질 것이다. 아내의 간곡한 애원에도 환자가 치료를 거부해서 그 후의 사정은 알 수가 없다.
인생 여정 동안 진짜의 나를 만나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앞 환자처럼 진짜의 자신을 잘못 찾으면 큰일이다. 그러니 끊임없이 자신의 정체성에 의문을 품기보다 현재의 자신을 받아들이고 주어진 임무를 감당하는 삶이 좋을 듯싶다. 그러다보면 가끔 진짜의 자기를 만나는 행운이 생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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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양곡 정신과 전문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