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에는 큰 비 소식 없이 여름이 지나가나 싶었는데 갑자기 허리케인이 동북부 해안을 따라 밀려왔다. 야외 테라스에 나와 앉아 느긋하게 햇볕을 즐기던 사람들 대신 거친 바람과 굵은 빗방울이 이 작은 도시를 점령해 버렸다. 지난 밤에는 연거푸 울려대는 재난 경보에 놀라 잠을 설쳤고 빗소리를 들으며 다시 잠이 들기를 반복해야 했다. 이 폭풍이 물러가면 여름도 끝내 강을 건너 갈 것이라는 생각을 했고 그제서야 나는 내 생에서 또 한번의 여름이 지나가고 있음을 깨닫는다.
사실 올해의 여름은 제대로 된 여름으로 만나 본 기억이 없다. 무더운 날은 더위를 피해 그늘로 숨어 들었고, 비가 오면 비가 지나 가기를 기다리며 그저 하루하루를 살아냈을 뿐이다. 장미가 피고 수국이 그 뒤를 따라 피었어도 ‘꽃이 피어 있네’ 라고만 생각했었다. 가끔씩 걸려오는 아이들의 전화를 통해 내 일상 밖의 세상에 잠시 관심을 가졌을 뿐, 그냥 살아 냈다는 표현이 적합할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큰 비가 지나간 탓인지 아침 저녁으로는 살갗에 와 닿는 바람이 다르게 느껴졌다. 반 팔 티셔츠를 입고 나서는 거울 속 내 모습이 왠지 궁색해 보여 긴 소매 셔츠로 갈아 입고 집을 나선다. 그동안 출근길에 보이지 않던 스쿨버스가 지나갔고 버스를 기다리는 아이들이 골목마다 나무처럼 서 있다. 천천히 일상으로 돌아가고 있었으나 그렇다고 예전의 그 일상은 아니어서 아직은 마음이 바쁘다.
우리집 작은 앞 마당에도 폭풍이 지나가며 흔적을 남겼다. 허리가 꺾인 나무 가지 사이로 여름 해가 다시 떠올랐지만 그 당당하던 위세는 이미 한풀 꺾여 있었다. 정원은 아내가 정성들여 심어둔 꽃들이 계절 따라 피고 진다. 늘 휴일의 반나절을 정원에다 쏟았고 그것도 모자라 하루 일을 끝내고 돌아오면 정원을 둘러보며 인사라도 해야했다. 아내는 자신이 심은 꽃을 제외한 것들을 모두 잡초라 불렀으나 내 눈에는 꽃을 피우고 있는 것들은 모두 꽃으로 읽혔다. 그게 늘 문제였다.
잡초가 더 무성하기 전에 얼른 뽑아야 한다는 아내의 성화에 못이겨 마지못해 정원에 들어 섰으나 제각각 꽃을 피우고 있는 꽃과 잡초 사이에서 나는 늘 시간이 필요했다. 작은 꽃 하나 하나에 이름을 지어줘 가며 정성을 들인 정원에서 엉거주춤 시간을 끄는 나를 아내는 못마땅해 했다.
아내가 여린 손으로 잡초를 뽑기 시작했다. 뽑혀져 바닥에 던져진 저 꽃들의 고향은 이 작은 마당이 아니라 사람의 손이 닿지 않는, 온전히 여름 해를 품을 수 있는 드넓은 평원일 것이라고 위로하며 아내를 따라 보라색 꽃이 핀 잡초를 뽑았다. 그리고 언젠가는 인적이 드문 외딴 곳에 작은 집을 두고 들풀들이 모여 사는 나만의 정원을 가꾸어야 겠다고 생각했다.
하루하루 눈 앞에 닥치는 일상을 숨가쁘게 따라가다 보면 주말이 왔고, 주말이 되어서야 겨우 한숨을 돌리며 지난 일주일을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되돌아 본다. 가까운 마켓에서 얼마간의 장을 보고 소진된 일상품을 채워 놓으면 주일의 저녁이 되었다. 이런 일상을 어떤이는 거룩하다고 말했고 또 다른 이는 치열하다고 했다. 나는 이 거룩함과 그 치열함 사이 어디쯤에서 하루를 살았고 다시 하루를 시작하고 있을 것이었다.
몇 해 전 부터 우리는 아이들과 서로를 번갈아 초대하여 식사를 나누고 있다. 아이들이 각자 독립하여 바쁘게 사니 정기적인 모임을 하자는 아내의 제안에 따라 우리 가족만의 특별한 이벤트를 만든 것이다. 두 아이가 뉴욕과 보스턴에서 지내니 격월로 아이들이 사는 도시를 방문하는 일은 여행을 떠난것 처럼 설레인다.
아이들과 서로 한 발짝씩 다가서며 시간을 공유하는 것도 기쁘고 멋진 식당에서 맛있는 음식을 나누며 아이들 이야기를 듣는 것은 덤으로 얻는 즐거움이다. 그날 이후 내가 가진것은 별반 달라지지 않았으나 삶은 조금 더 윤택해졌고 밖을 향한 시선 또한 따뜻해졌음을 느낀다. 큰아이가 있는 뉴욕으로 가는 날에는 주로 기차를 타는데 기차에서 처음 본 이들이 나처럼 그들도 일상에서 벗어나 누군가의 초대를 받았거나 누군가를 초대하기 위해 이 기차에 탔을 거라고 여겨져 행복해 보였다. 오래된 지하철을 타기 위해 좁은 지하도를 오르내리면서도 스쳐가는 그들 역시 만남에 대한 기대감이 가득한 얼굴로 보인다.
내가 아침부터 저녁까지 일에 매여 일상을 살아갈 때는 마주치는 이들도 일에 쫓겨 바쁘게 산다고 생각되었는데 내가 일상 밖으로 한 걸음을 내 딛는 순간 그들도 나와 같을 거라는 생각을 하며 한결 여유로워진 것이다.
기울어진 빛이 가을 문을 노크하며 들어선다. 나에게 노란 가을을 선물하기로 하고 집으로 들어오는 길이 국화 화분을 샀다. 아내가 여름 내내 현관 앞에 두었던 제라늄 대신 국화 화분을 심는다. 작은 국화꽃이 바람보다 먼저 흔들렸다. 가을 내내 은은한 달빛을 받으며 점점 노랗게 익어갈 것이다. 진한 향기로 오랫동안 내 방문 앞에 머물러 주기를 바라며 함께 담담히 익어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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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동선 수필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