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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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달, 그 색깔의 무게

2021-09-18 (토) 김영수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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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 올림픽에 이어 패럴림픽도 막을 내렸다. 코로나 사태로 일 년을 미룬 끝에 무리하게 강행하여, 제대로 시작이나 할 수 있을지 우려하던 행사였다. 우려라기보다는 이런 상황에서 강행하는 주최측의 의도를 이해하기 어려워 올림픽 개최를 바라보는 시각은 다분히 부정적이었다. 어렵게 시작한 후에도 선수들 사이에 코비드 19 확진자가 발견되면서 언제 중단될지 모르는 나날을 지켜보며 마음을 졸였다.

무관중 경기라는 기이한 올림픽으로 기억되겠지만, 경기 자체는 비교적 조용한 가운데 예전과 다르지 않게 즐길 수 있었다. 코로나 사태로 떠들썩할 수 없는 분위기의 영향인지 몰라도, 메달 숫자에 집착하여 전에처럼 하루에도 몇 번씩 방송으로 메달 집계와 순위를 요란스럽게 보도하지는 않았다. 금메달만 메달인 양 집중조명하는 경향도 줄었고, 모든 메달을 귀하게 여기는 성숙한 보도 자세는 어느 해보다 눈길을 끌었다.

동메달을 받은 선수는 풀이 죽어 고개 숙인 채 화려한 금빛에 밀려 사라지던 과거의 아픈 기억 대신에, 올해는 색다른 장면이 마음에 남을 것 같았다. 동메달을 목에 걸고 당당한 웃음으로 기뻐하는 우리 선수의 모습이 클로즈업될 때 나는 마치 오래 전에 잃어버린 소중한 무엇인가를 되찾은 것처럼 가슴이 뭉클했다.


경기를 지켜보는 시청자들도 따듯한 관심으로 한마음 되어 차분히 응원하는 모습이었고, 실수로든 실력 차이로든 탈락한 선수를 위로하고 함께 안타까워했다. 선수들이 흘린 땀과 노력의 결실에 가치를 매기며 사회적 저울과 잣대로 측정한 것들에는 필요 이상의 큰 의미를 두지 않았다. 정상의 턱 밑에서 좌절된 꿈을 버리지 못한 채, 금 은 동으로 빛나는 단상 바로 아래 4위라는 평지에 머물러야 했던 선수들이 내내 눈에 아른거렸다.

하지만 최선을 다한 노-메달리스트들의 아름다운 모습을 잊지 않고 진심 어린 위로를 보내는 시민들의 목소리는 따듯했다. 무엇보다 메달에 아랑곳없이 뜨거운 박수를 보내는 시민 의식이 인상 깊었다. 언론도 메달 색깔에 연연하지 않고 선수 자신의 이전 기록과 비교하여 성취도를 알리는 데 주력했다. 선수와 관중과 언론이 어깨를 겯고 한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을 목도한 느낌이었다. 이번 두 대회에서의 대한민국은 여러 모로 예전과 많이 달랐다.

“어떻게 그 기나긴 시간 동안 쉼 없이 땀흘리며 훈련을 계속할 수 있었는지요.” 어느 해엔가 선수들에게 그렇게 질문한 기자에게, 올림픽에 참가하여 메달 따서 부모님께 효도하는 것이 목표이기에 가능했다는 몇 선수의 대답을 들은 기억이 난다. 물론 메달이나 효심은 그 어느 보상보다 강력한 동기 유발이 될 수 있는 좋은 목표다. 그렇다면 최선을 다했는데도 메달을 못 따면 불효인가? 메달 자체가 목적이라면 실패했을 때의 충격과 성공 후의 허탈감을 감당하기가 그만큼 더 어려울 수 있다.

헌데 이번에 참가한 선수 중에 ‘경기를 즐기고 싶다’ 또는 ‘자기 자신을 위해서’라고 하는 말이 오가는 인터뷰를 보았을 때 체육계에도 변화의 바람이 불고 있다는 걸 체감했다. 그 표현처럼 선수들이 자신의 꿈을 위해, 즐기며‘ 훈련하여 메달에 가 닿는다면 더 바랄 게 없을 것이다. 설령 메달을 손에 넣지 못해 환호나 응원의 박수가 뒤따르지 않는다 해도 좌절이나 아쉬움이 덜할지도 모른다.

목표는 세우되 결과에 집착하지 않는 삶의 방식은 하루 아침에 이루어지지 않는다. 이는 국가대표 선수에만 국한된 문제가 아니다. 어떤 일을 하든 원하는 목표는 자신보다 높은 곳에 있다. 정상에 오르는 길은 여러 갈래일 터. 끝까지 오를 수도 있지만 올라가는 도중에 예기치 않게 불어오는 바람을 만나 방향을 틀 수도 있다. 게다가 정상에 오른다 해도 원하던 목표인 꽃은 딸 수 없는 경우도 허다하다.

에둘러 가더라도 올라가는 시간을 즐기던 사람은 중도에 내려오거나 정상에 올랐는데 꽃을 얻지 못하더라도, 그렇지 않았던 사람보다 조금 더 열린 마음을 가질 수 있지 않을까. 눈물겨운 노력 끝에 한 국가를 대표하여 그곳까지 오른 것만으로도 행운이 따르는 일이었음을. 메달을 놓치고도 자신의 기록을 경신하는 것으로 만족하며 화면 속에서 맑게 웃는 얼굴이 보이면 안타까우면서도 한편으로는 안도했다.

어린 선수들로서는 쉬운 일이 아닐 텐데 경기 자체를 즐기는 성숙한 모습에, 비교와 경쟁만이 삶의 추동력인 줄 알고 살아야 했던 구시대의 멀지 않은 과거가 되살아나며 만감이 교차했다. 메달 숫자가 곧 국력임을 외치며 금빛 메달에만 환호하던 기존 세대가 막을 내리고, 과정 자체를 즐길 줄 알며 삶의 질적 가치를 존중하는 새로운 세대가 열린 것일까. 코로나가 여전히 변종을 거듭하여 공격하는 상황이지만, 이번 경기를 보며 다함께 이겨 나아갈 희망의 빛을 본 것 같아 마음이 가볍다.

<김영수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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