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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악산책] 작곡가 세종대왕의 여민락(與民樂)

2021-09-17 (금) 손화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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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에 있어 작곡은 재미있는 과정의 하나이다. 마치 글을 쓰는 것과도 같아서 생각한 대로 역동적이게도, 섬세하게도 표현할 수 있다. 때로는 서양화가에게 수묵 붓을 쥐여주며 동양화를 그려보게 하기도 하고, ‘동창이 밝았느냐’를 우직하게 부르는 가객에게 오페라를 불러보게 하는 것처럼 현대에서는 작곡가의 배경과 서로 다른 정서, 문화가 혼합되며 색다르고 재미있는 작품이 탄생하기도 한다. 서양 작곡가들이 작품에 개인적인 의미를 두었다면 옛 동양에서는 음악 작품에 철학사상과 국가 이념 등 대승적 차원에서 의미를 부여했다.

조선 시대 세종대왕은 한글 창제라는 뛰어난 업적에 가려져 음악가로서의 면모는 현대인들에게 크게 드러나지 않는다. 하지만 세종은 우리 고유의 악보를 만들고 악기를 조선의 실정에 맞게 재정비하였을 뿐만 아니라 작곡가로서 직접 음악을 만들기도 했다. 세종실록에는 유난히 음악에 관한 내용이 많은데 세종이 음악을 만드는 장면에 대해 이렇게 서사한다.

‘임금은 음률에 대해 밝았다. 신악(新樂)의 절주(節奏)는 모두 임금이 제정한 것으로, 지팡이를 짚고 땅을 쳐서 음절을 구분하여 하룻저녁에 제정하였다.’ 성군의 업적에 대한 과함을 차치하고서라도 하룻저녁에 지팡이를 쳐서 음악을 만드는 장면은 작곡가로서의 세종의 면모를 일부 보여준다. 얼핏 작곡이라는 것이 무척 쉽게 느껴질 수도 있으나 세종의 뛰어난 음악성을 보여주는 기록이라고 보는 편이 더 정확할 것이다.


조선은 성리학을 국가의 통치이념으로 삼은 유교 국가였다. 특히 세종 전후에 저명한 성리학자들이 성균관 중심의 국가 성리학을 발전시켰는데 초기의 성리학은 주로 정치 질서의 변혁이 강조되었다. 백성을 존중하는 민본사상(民本思想)이 성리학의 핵심인데 성리학은 음악을 통치의 한 부분으로 여긴다. 음악으로 풍속과 민심을 다스려 정치를 안정되게 하는 그야말로 좋은 정치의 수단이었다. 이에 세종은 초기 조선의 기강을 확립하고 이상적인 국가를 건설하는데 음악을 그 도구로 사용하고자 했다.

세종은 이처럼 좋은 음악을 만드는 데 노력을 기울였고 백성과 함께 즐거움을 나누고픈 자신의 마음을 담아 ‘여민락’을 작곡한다. ‘백성과 더불어 즐긴다’라는 의미의 여민락은 노랫말이 아주 아름답다. 훈민정음이 창제된 후 한글로 기록된 최초의 문헌으로 조선 개국의 정당성을 알리고 선조의 위업을 찬양하는 한글 서사시 ‘용비어천가’의 가사에 선율을 얹었다. 용비어천가 125 장 중 1 장부터 4 장까지와 마지막 장의 가사를 10 장으로 나누어 관현악 반주에 맞추어 노래했다. 요즘은 성악을 제외한 기악 연주만 하지만 그 가사는 다음과 같다.

‘해동(조선)의 여섯 용이 나시어 일마다 하늘이 내려주신 복이시니, 옛 성인과 꼭 같으시니,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아니 움직이니 꽃 좋고 열매 많나니, 샘이 깊은 물은 가뭄에 그치지 아니하니 내(川)를 이뤄 바다에 가나니…(중략) 천세(千世) 전에 미리 정하신 한강 북쪽에 여러 대에 걸쳐 어진 덕을 쌓아 나라를 여시어 왕조가 끝없으시니.’

이는 당시의 작곡 방식이기도 했는데 좋은 노랫말로 쓰일 글이 있으면 그 글을 노래 가사로 쓰고 가사에 어울리도록 곡을 만드는 것이다. 세종은 자신이 만든 여민락을 국가 의례를 위한 음악으로 사용하며 궁중 의례에 참석하지 못하는 백성을 위해 의례 후에 백성에게 쌀과 음식을 내려 여민락의 뜻처럼 백성과 함께하는 정신을 직접 실천하였다.

여민락은 원래 대궐 안의 잔치 때 쓰던 ‘봉래의(鳳來儀)’ 중 한 곡으로 주로 임금의 출궁과 환궁에 사용되었다. 봉래의는 대규모의 모음곡이지만 노래와 춤, 기악까지 갖춘 웅장한 공연물로 공연 음악의 진수이다. 세종은 나라에서 중국 음악이 아닌 조선 고유의 음악을 쓰도록 하고 싶어 했는데 이는 여민락뿐만 아닌 제사 음악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우리나라는 멀리 동쪽에 있어 음악이 중국과 같지 않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살아서 우리 음악을 듣다가 죽은 뒤에는 중국음악을 듣게 되는 셈인데 제사를 지낼 때 평상시 듣던 음악을 쓰는 것이 어떠한가?” 이처럼 세종은 우리 음악을 모든 음악의 기본으로 삼으려 했으나 박연을 비롯한 대신들은 중국의 음악을 지지하며 세종의 의도를 반대했다. 따라서 세종은 직접 우리만의 음악을 작곡하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고 마침내 용비어천가를 가사로 한 노래를 만들게 된 것이다. 세종 13년부터 27년까지 세종의 작곡에 관한 기록은 없다. 세종은 작곡할 때 실제로 궁중에서 사용할 수 있는지 점검하고 비밀리에 궁녀와 무희를 불러 노래와 춤을 맞춰 보기도 했다. 사관의 기록에 작곡의 일화가 들어가기까지 반대자들에 부딪혀 많은 시간 동안 은밀히 우리 음악 정비를 진행한 것이 훗날 뛰어난 작곡가로서 밑거름이 된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이후 세종은 병환으로 재위 기간 우리 음악만을 쓰게 하려는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으나 수양대군 시절부터 세종의 곁에서 작곡을 도우며 지켜본 세조에 의해 마침내 그 뜻을 이룬다. 세조는 즉위 후 이전에 쓰던 옛 음악을 폐지하고 아버지인 세종이 작곡한 음악만을 사용할 것을 명했고 세종의 바람처럼 조상의 제사에도 세종이 직접 작곡한 음악을 쓰기 시작했다. 우리만의 음악으로 조선의 기강을 확립하고 백성을 지극히 사랑하는 마음에서 만든 여민락은 현재까지 세종이 직접 만든 악보에 남아 전해진다.

<손화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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