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앗다, 즐라도 광주랑께 또 묻고 또 묻는디야~?’
내 일생일대의 숙적이었다가 이제는 절친이 된 경남 양산의 세살 터울 위 누나와 나는 모처럼 카톡을 하면서 스마트폰 화면 뒤에서 서로 키득키득 웃는다. 몇달 전 심각하게 살이 빠진 누나의 카톡 사진을 보고 놀란 나는 얼마 안되는 몇백불을 보내며 즉시 병원에 가 검사를 받아보라 권했고, 누나는 다행히 인후암 초기 증상이 발견돼 키모를 맞으며 더 이상의 악화를 막을 수 있었다. 누나가 흉내를 낸 것은, 내가 어린 아이였을 때인 ‘64년 사업에 실패한 부모님이 20여년 살던 정든 부산시 서구 동대신동 저택을 떠나 서울역의 오가는 기차들이 훤히 내려다 보이는 용산구 청파동 언덕 받이에서 몇달간 셋방을 사시던 끝에, 초등학교 입학 바로 전 해인 ‘65년 성북구 돈암동의 절벽 위 초갓집을 사서 이사를 와 처음 만났던 부랄 친구 종모네 아줌마로 부터 늘 들어왔던 세상 친근한 호남 사투리다.
종모네와 우리집은 근 20년을 함께 살던 돈암동을 재개발로 떠나야 했을 때 장위동으로 수유리로, 또 우이동으로 함께 이사를 다닐 정도로 (아버지들은 모두 50, 60을 못 넘기고 돌아가셨지만) 어머니들끼리도 정말 가까워서 나는 마치 우리 집에 가는 것처럼 친구가 있건 없건 스스럼 없이 불쑥 불쑥 찾아가곤 했었다. 그러면 아줌마는 점심이면 점심, 저녁이면 저녁, 하시라도 맛있는 식사를 차려 주시곤 하셨다.
친구와는 티격태격, ‘니가 옳네 내가 옳네’ 싸움도 참 많이 하며 자랐지만, 둘 다 결혼해 아이들이 아직 어릴 때는 인근의 우이동 그린파크로, 도선사로 진달래 피는 봄이라고, 단풍지는 가을이라며 철마다 함께 피크닉 다니며 아이들 끼리도 대를 이어 친구로 만들어 주려 했던, 정말 뗄래야 뗄 수 없는 절친한 친구요 이웃 사촌이었던 것이다. 고입 연합고사를 무난히 잘 치른 ‘75년 1월, 사춘기의 심한 열병을 앓던 종모와 나는 태어나 처음으로 집을 떠나 호남선을 타고 멀리 전라남도 광주시 학동에 사시던 종모네 외삼촌 댁(조병철 당시 조선대 학생처장) 엘 놀러 갔었다. 우리는 따뜻한 아랫목에 턱을 괴고 누워 고등학생이던 외사촌 형이 연탄불에 노릇노릇 구워 온 가래떡을 조청에 찍어 먹으면서 트랜지스터로 은은히 흘러나오던 이장희의 ‘나 그대에게 모두 드리리~’ 같은 아름다운 노래에 푹 빠지며 내게 다가올 반쪽은 도대체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는 누굴까? 하며 파피 러브의 무한 상상의 나래를 펼치곤 했었다.
사흘인가 지낸 후 우리는 불과 5년후 광주 민주화 운동의 거점이 된 화순으로 가서 시외버스를 타고 산길(전라도에 산길이 참 많았었다) 을 수시간 달려 보성군 복내면에 내렸다. 다시 버스를 갈아타고 꼬막으로 유명한 벌교를 지나 이윽고 녹차로 유명한 보성군 율어면의 유학자 이신 할아버지(제달동 어른) 댁에 밤이 이슥해서야 간신히 도착하였다. 며칠간 머물며 나는 짚으로 아궁이에 불도 때 보고 투박한 시골 가래떡 기계로 설떡을 뽑는 구경도 해 보았다. 처음 만난 시골 친구들 과의 논두렁 밭두렁 축구 시합에서는 도시에서 가져간 축구 신기술인 현란한 페인트 모션도 과시해 시골 아이들의 탄성을 자아내게도 하였다. 할아버지와 작별인사를 나눈 우리는 이번엔 겸백을 거쳐 영산강 하구언 개발공사가 막 시작되던 장흥군 장평읍에 있던 고래등 같은 기와집이 뼈대 있는 가풍임을 암시하던 외갓집으로 가서는 닭머리가 통째로 들어있던 전라도식 새해 떡국을 먹으며 화들짝 놀랬던 기억이 지금도 바로 어젯 일 처럼 생생하다.
70년대 초반 모두가 못살던 산동네에서의 팍팍했던 삶 속에서도 종모네 집은 아버님이 국립 중앙도서관에서 안정된 사서 공무원 생활을 하시는 한편, 서지학자로도 이름이 높으셔 집안에는 항상 수백년된 고서가 수백권 소장돼 있다가는 어느 곳인가로 팔리거나 기증되고는 한데다, 부지런한 아줌마는 부업에도 하루 종일 열심이라 인정이네, 베짱이네, 용자네 등 재밌는 별명의 초딩 여자 후배네 아줌마들과 함께 양복의 초벌 틀을 꿰메는 ‘가닷 일’ 부업에도 열심이셔서 하루 수십벌씩 바느질을 하시며 알뜰히 사셨다. 자연히 동네에서 수도가설도 철제 캐비닛도 닐 세대카의 ‘유 민 에브리 띵 투미’가 흘러 나오던 전축도, 테레비도 제일 먼저 장만했을 정도로 여유가 있는 집이 되었다.
중딩이던 내가 불과 세 살차라 만만했던 누나와 철없는 일로 투닥투닥 하던 끝에, 누나가 비닐로 곱게 싼 내 교과서 몇권을 마당으로 내 팽겨치며 내가슴에 결정적인 못을 박으면 그만 육박전 일촉즉발의 상황으로 번지며 동네가 소란스러워 지기 시작 했는데 그럴 때 마다 밑에 집의 종모 아줌마는 근심스러운 얼굴로 후다닥 달려 오셔서는 ‘앗따, 고만 하랑게?’ 하시며 싸움도 뜯어 말려 주셨다. 보험회사에 다니시던 열살 정도 위의 우리 엄마가 파김치가 돼 저녁에 귀가하시면 ‘형님, 은영이 저것.. 오메, 썩발이 같은 년, 싸납등그~’ 하시며 주로 누나의 비리를 엄마에게 일러 바쳐 내편을 들어주곤 하셨던 것이다. 오늘 출근해 주차장을 걷자니 오동닢이 한닢 쓸쓸히 길위에 구르며 가을이 왔음을 내게 알려준다. 10여년전 돌아가신, 우리에게 그렇게 잘해 주시던 아주머님을 생전에 찾아 뵙고 인사 드리지 못한 불효에 후회가 막급하다. ‘아줌마, 천국에서 내려다 보고 계시지요? 다시 뵈올 때까지 안녕히 계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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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덕환 실리콘밸리 부동산업체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