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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광덕 칼럼] 여론조사에 ‘드루킹’끼어들면 ‘킹’이 바뀐다

2021-09-09 (목) 김광덕 서울경제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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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조작을 주도한 ‘드루킹’ 같은 존재가 여론조사에 개입한다면 대선 승부는 어떻게 될까. 대선을 6개월여 앞두고 이상한 여론조사 결과가 쏟아지는 걸 보면서 이런 생각을 했다. 여야 대선 주자 지지율이 조사 기관에 따라 심하게 널뛰기를 하고 있다. 최근 일주일 동안 발표된 10여 개 대선 주자 지지율 조사 결과를 보면 더불어민주당 소속 이재명 경기지사와 국민의힘 소속 윤석열 전 검찰총장이 앞선 경우가 각각 절반쯤 됐다.

KBS-한국리서치가 지난 12~14일 실시한 대선 주자 다자 대결 여론조사에서 이재명의 지지율은 25.6%로 18.1%에 그친 윤석열보다 훨씬 높았다. MBC-코리아리서치가 16~17일 조사한 결과 이재명은 29.8%로 윤석열(19.5%)을 더 큰 차이로 제쳤다. 반면 TBS-한국사회여론연구소(KSOI)가 13~14일 실시한 조사에서 윤석열은 30.6%나 얻어 이재명(26.2%)보다 앞섰다. 뉴데일리·시사경남-피플네트웍스(PNR)의 17일 조사에서는 윤석열 30.9%, 이재명 28.6% 순이었다.

춤추는 지지율을 보면서 2012년 18대 대선 때 풍경을 소환하지 않을 수 없다. 당시 주요 언론사들은 12월 대선을 일주일 앞두고 막판 여론조사를 실시했다. 대다수 조사에서는 박근혜 새누리당 후보가 문재인 민주통합당 후보보다 앞섰다. 그러나 한 일간지가 A 여론조사 기관에 의뢰한 조사에서는 유독 문 후보(45.3%)가 박 후보(44.9%)를 근소한 차이로 제쳤다. 민주당 측은 “지지율 골든 크로스(상향 돌파) 현상이 벌어졌다”며 홍보전을 펼쳤다. 투표함을 열었더니 박근혜 51.6%, 문재인 48.0%로 나타났다. 당시 이례적 조사 결과를 냈던 A 기관은 문재인 정부 출범 후 정책 공론 조사를 포함해 청와대와 정부·공공기관이 의뢰한 여론조사를 자주 맡아왔다. 요즘에는 한 방송사 의뢰로 대선 여론조사도 하고 있다. 여권 관계자는 “A 기관이 정부 의뢰 조사를 많이 수주한 것은 기관 규모 등의 요인 때문이지 다른 배경은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지지율이 들쭉날쭉한 원인은 우선 조사 방법의 차이에서 찾을 수 있다. 한국리서치·코리아리서치 등 전화 면접원이 묻는 방식에서는 이재명이, KSOI·PNR 등 자동응답방식(ARS)에서는 윤석열이 높게 나온다. 응답률이 낮은 ARS에서는 적극 참여층이 상대적으로 많은데 그중에는 정권 심판을 바라는 유권자가 다수 포함돼있다. 두 번째 원인은 유·무선 전화 배합 비율의 차이다. 100% 무선전화를 대상으로 할 경우 친여·진보 성향 의견이 상대적으로 더 많이 반영되지만 집 전화를 많이 반영할수록 친야·보수층 표본 부족을 보완할 수 있다.

조사 요일·시간대에 따라서도 정치 성향 비중이 달라진다. 주중 낮 시간대 조사에 치중하면 친여 성향이 우세한 화이트칼라 응답률이 높아진다. 1차 질문에 그치느냐, 아니면 2·3차까지 ‘스퀴즈’ 하느냐에 따라 후보의 지지율이 변할 수 있다. 질문을 ‘선호도’ ‘호감도’ ‘적합도’ ‘경쟁력’ ‘투표 의지’ 중 어디에 초점을 맞추느냐에 따라서도 답변은 달라진다. 반복 조사를 위해 ‘유권자 패널’을 구성할 경우 표본의 여야 성향 비중이 후보들의 희비를 가른다.

조사 기관이 굳이 수치를 조작하지 않더라도 여러 변수들의 교묘한 조합과 ‘마사지’를 통해 새로운 판세 흐름을 연출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한국처럼 정치에 여론조사를 많이 활용하는 나라는 없다. 특히 여론조사가 여론조사를 확대재생산 하는 ‘밴드왜건 이펙트’가 어느 나라보다도 뚜렷하게 나타난다. 결국 여론조사가 한 번 왜곡되면 ‘나비 효과’로 대선 승패가 뒤바뀌는 상황이 초래될 수도 있다.

민주주의 꽃인 선거를 공정하게 치르려면 조사 기관들이 중립적이고 투명하게 여론조사를 실시해야 한다. 특정 정파의 여론조사 개입을 막기 위해서는 정치권 인사들의 조사 기관 진출을 제한하는 법을 만드는 방안도 검토해야 할 것이다. 중앙선거여론조사심의위원회 등은 여론조사 과정에 ‘제2 드루킹’이 끼어들지 못하도록 관리·감독을 철저히 해야 한다. 그래야 ‘킹’이 뒤바뀌는 것을 막고 민주주의를 지킬 수 있다.

<김광덕 서울경제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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