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 어쩌면 저 나이에 저렇게도 기억력이 탁월할 수가 있어. 저 걸음걸이 봐. 흐트러짐 하나 없네. 정말 대단해.”
몇 년 전 동료 철학자들과 함께 대한민국의 부조리를 고발하는 연극을 한 적이 있었다. 그때 100세를 넘기신 철학 교수가 5분간 대본 없이 모든 대사를 암기해 보여준 연기에 다들 감탄했다. 워낙 바쁘신 분이고 고령이신지라 “과연 우리의 요청을 수락해주실까”하고 처음에는 반신반의했다. 대한민국이 부패한 상황에서 의인을 찾아 나서면서 등불을 밝히는 역할을 맡아주실 분은 김형석 교수밖에 없다는 데 의견이 모였기 때문이다. 결국 연극에서 하이라이트를 장식하는 장면을 멋지게 연출해주셨다. 그 연극에서 나는 퉁퉁한 몸집과 기름진 얼굴 때문에 재벌 회장 역할을 맡았다. 외워야할 대사가 너무 많아 노트북에 쓰인 대사를 곁눈질로 보고 읽었다. 무슨 연기가 그렇게 딱딱하냐는 핀잔이 돌아왔다. 사람들 눈이 무섭다.
인생은 연극이다. 대본 없이 펼쳐지는 즉흥극이다. 시작할 때 관객들에게 보고 싶은 설정을 키워드로 던져달라고 요청한다. 그 단어를 중심으로 여러 배우가 즉석에서 상황을 설정하고 역할을 분담해서 끌어간다. 수준 높은 배우들이 펼치는 즉흥극을 보고 있노라면 신기한 감정까지 든다. 도대체 어떻게 훈련했길래 호흡이 저렇게도 척척 맞을까. 마치 문제지를 사전에 보고 시험 치는 것처럼 말이다.
딸아이가 미국에서 초등학교 1학년에 다닐 때였다. 한번은 학교에 일일 보조교사로 참여하게 됐다. 마침 ‘쇼 앤드 텔’ 시간이다. 아이들이 저마다 물건을 하나씩 들고 와 반 친구들에게 설명해주는 것이다. 어떤 아이는 컵을 가져왔고 어떤 아이는 사진을 한 장 들고 오기도 했다. “아하! 저거구나.” 어렸을 때부터 늘 발표하고 경청하는 것을 수업시간에 자연스럽게 배우는 것이구나. 미국 공교육에서는 연극 수업이 아예 정규 커리큘럼에 들어있다.
‘내비게이션이 없으면 어떻게 집 밖에 차 몰고 나갈까’ 할 정도가 됐다. 요즘 내비게이션은 음성인식도 된다. 편한 세상이다. 그런데 내비게이션을 사용하면서 가장 힘들 때는 바로 작동하고 난 직후다. 현 위치에서 왼쪽으로 가라는 건지 오른쪽으로 가라는 건지 참 알기 힘들다. 어느 쪽으로 가는지에 따라 정반대 방향인데도 화살표가 마구 왔다 갔다 한다. 설령 반대 방향으로 갔다고 하더라도 금세 교정하면 되지만 말이다.
여의도 정치판을 보면 도대체 서로 국정 운영 파트너로 생각하는 것인지 박살내야 할 적으로 생각하는 것인지 궁금할 정도로 적대적이다. 분명히 잘못됐다. 국정 운영의 목표가 국민을 외침으로부터 지켜내고 경제를 살리는 것에 있다는 것을 망각한 행위다. 그래서 자꾸 ‘내로남불’ 언행이 나온다.
즉흥극의 목표는 같은 결론에 도달하는 것이다. 놀라운 점은 사전에 공유한 대본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같은 엔딩을 한다는 것이다. 우리 정치인들이 하지 못하는 것을 즉흥극 배우들은 어떻게 해낼까.
그들은 오픈 마인드를 갖고 있다. 핵심은 ‘예스(yes), 앤드(and)’ 기술이다. 일단 상대방이 하는 말을 수긍하고 거기서부터 출발한다. 상대방이 무슨 말을 하든 ‘노(no), 버트(but)’라고 말해버리면 거기서 연극은 끝난다. 액셀과 브레이크를 동시에 밟아보라. 더 이상 전진할 수 없다. 위치정보시스템(GPS)이 고장 나면 갈 방향을 모르게 되는 것도 같은 이치다.
부모가 부모 역할을 하고, 자식이 자식 역할을 하고, 임금이 임금 역할을 하고, 신하가 신하 역할을 하는 것이 공자의 정명(正名) 사상이다. 각자 맡은 역할을 충실히 해내면 대동 사회가 이뤄진다. 플라톤은 수호자 계급이 지혜를, 전사 계급이 용기를, 노동자 계급이 근면의 덕목을 실현하는 것이 정의가 실현되는 이상 국가라고 했다. 맞는 말이다. 문제는 그 역할과 덕목이 고정돼있다는 데 있다. 연극을 통해 다양한 역할을 맡아라. 그러면 남의 처지를 이해하고 시야가 탁 트이고 서로 돕는 마음이 생긴다. 공교육에서부터 연극을 가르치자. 회사 내에서 소통을 위한 연극을 활성화하라. 정치는 연기가 아니라 연극이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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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현 전 연세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