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속되는 어려운 상황 속에서 우리 모두 위축되기는 했지만 여기서 주저 않을 수 없다는 용기로 힘을 합치기 시작하고 있다. 사랑은 절망 속에서 더 간절해지기 때문이리라. 여러 분들이 힘을 합쳐 더 필요한 이웃들을 향해 사랑의 손길을 뻗치고 있다.
초등학교 때의 추억이 생각난다. 세검정(현, 평창동)은 지금은 부촌이 되었으나 내가 자랄 때는 서울 사대문 안에서 살 수 있는 형편이 안 되는 사람들이 살던 변두리의 가난한 곳이었다. 그렇지만, 과일 나무가 많았고 삼각산을 끼고 있어 아름답고 포근한 마음을 주는 곳이기도 했다. 우리 집도 넉넉한 편은 아니었으나 경제적 사정이 훨씬 더 어려웠던 친구들이 많았다. 한 여름 방학동안 친구들과 이웃돕기 운동을 하기로 하고 돈을 모으기로 하였다. 궁리 끝에 신문배달을 하는 친구도 있었고 아버님들의 구두를 닦아 용돈을 모으는 친구도 있었으나, 나는 아이스케키 장사를 시도 하였다. 더운 날 도매상에서 아이스케키를 가져다가 잘 팔면 돈이 꽤 남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 시도는 곧 실패로 끝났다. 아이스케키를 사 먹으려는 사람도 많지 않았거니와 시간이 지날수록 성능이 좋지 않은 냉동고 안의 아이스가 녹아내리는 바람에 친구들끼리 나누어 먹고 겨우 본전을 건지기도 힘들었다.
낙담을 하고 있을 때 어머님이 다른 아이디어를 주셨다. 우리 집은 삼각산과 근처 유원지로 올라가는 길가에 있었는데 집 앞에는 맑은 물이 나오는 옹달샘이 있었고, 넓은 마당에는 옥잠화, 채송화, 봉숭아 등 화초들이 많이 있었다. 어머님은 화초 한 포기씩을 신문지에 싸서 길가에 나열해 놓으면 등산을 갔다가 시내로 귀가하는 사람들이 가져갈 것이라고 하셨다. 우선 밑천이 안 들고 녹아내릴 염려가 없는 물건이니 마음이 편했다. 정성껏 화초를 싸서 나열해 놓고, 여동생에게는 옹달샘에서 물을 떠먹을 수 있는 조롱박을 들고 등산객들이 마른목을 축일 수 있도록 도우라고 부탁했다. 예상대로 여름 동안 산과 유원지를 다녀가는 많은 사람들이 옹달샘에서 목을 축이고 화초를 가져가면서 돈을 주고 갔다. 꼬박꼬박 모은 것을 어려운 친구들을 위한 성금으로 내놓을 수 있었다. 초등학교 때의 그 작은 경험이 나에게는 큰 여운으로 남아 있다. 부자가 아니라도 나눌 수 있다는 것과 형편에 맞게 세상 살아가는 어머님의 지혜와 이웃과 희망을 공유할 수 있는 기회를 체험하였다.
우리 인체에도 어려움을 함께 헤쳐 나가는 지혜가 심겨져 있다. 예로 우리 몸에 출혈이 심하여 혈액이 부족해진 상태나, 바이러스 혹은 박테리아 등의 병균에 감염되어 온 몸이 쇼크에 빠지게 되는 경우 우리 몸의 장기는 서로 도와가며 생존한다. 출혈 때는 절대적인 혈액의 양이 부족해져서, 염증으로 인한 쇼크 때는 미생물들의 독소와 몸에서 나오는 염증 매개체의 반응에 의해 온 몸의 혈관이 확장되고 혈압이 떨어져서 장기로 보낼 수 있는 혈액이 상대적으로 부족하게 된다. 결과적으로 온몸에 고른 혈액 순환이 어려워지게 되는 어려운 상황이 되면, 우리 몸은 산소 부족에 더 민감한 장기로 피를 우선적으로 공급하게 된다. 산소 공급에 민감한, 뇌, 심장, 폐로 먼저 혈액을 공급하고 상대적으로 더 기다릴 수 있는 신장, 팔다리 근육 쪽으로는 혈액 공급을 줄여가며 고통 속에서 버텨나간다. 치료로 수액공급, 수혈, 항생제, 산소 공급 등으로 우리 몸이 쇼크에서 벗어날 때 까지 잘 버티면 모든 장기들이 같이 살게 되는 것이다. 몸의 모든 각 지체는 어떤 고통에든 같이 반응하여 평형을 잡아가며 함께 생존한다.
그런 위험한 시간을 지나면서 가장 오래 동안 인내하는 장기 중 하나가 신장(콩팥)이다. 신장은 심한 쇼크에 빠졌다가도 3-6개월이 지나서 회복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목숨은 건졌으나 신장이 영영 회복하지 못해 만성 신부전증으로 투석을 하거나 신장 이식을 해야 되는 경우도 있다. 밖으로 나타나지 않지만 다른 장기를 위해 고통을 감내하는 콩팥 같은 인생에 우리는 박수를 보낸다.
쇼크에서 살아남는 우리 몸의 지혜는 우연히 생겨난 것이 아니다. 절망 속에 있었던 우리에게 누군가의 희생과 사랑이 몸속 까지 스며들어가서 생겨진 흔적이며 경험이라 생각된다. 고통과 사랑을 나누면 같이 살게 되고 희망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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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식 내과의사·수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