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롬바르드 꽃길의 수국

2021-07-17 (토) 김덕환 실리콘밸리 부동산업체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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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선화? 아닌데… 아, 너무도 아름답게 소담한 색으로 활짝 핀 이 꽃 이름이 뭐였더라…

팬데믹이 오기 전 해인 2019년 봄이니 어느새 2년이 흘렀나보다. 벌써 50년전 초딩시절 이야기이다. 여학생 중에서는 제일 공부도 잘하고 앞에 나가 발표도 어찌 그리 잘하던지, 사춘기가 올동말동하던 우리 남학생들 사이에서 선망의 대상이었던 채식이가 인터넷 동창회 밴드에서 소통 끝에 생애 첫 미국 여행길에 이곳을 들러 근 50년 만에 재회를 했던 것이다.

유학생으로 이민 오셔서 인텔리 할아버지가 되신 가든그로브의 숙부 댁에 짐을 끌러놓고는 다음날 바로 내가 사는 샌프란시스코로 렌터카를 빌려 두살 위 터울의, 그러니까 내게도 2년 선배가 되는 역시 우등생 출신 언니분과 함께 다니러 왔던 것이다.

당시는 4월초라 꽃들이 이렇게 활짝 피기 전이어서 꼬불꼬불 아기자기 내려가는 언덕길 외에는 별다른 감흥이 없었는데, 이번 일요일 날 모처럼 달린 샌프란시스코의 롬바르드 꽃길에는 화려한 색채의 하이드랜쟈(Hydrangea 수국)가 만개해 장관을 이루고 있었다. 아직 팬데믹의 영향권에서 완전히 벗어났다고 할 수는 없는 상황이라 관광객은 2년전보다 훨씬 줄은 채였다. 혼자 보기엔 너무 아까워 서행해 내려가는 차에서 찍은 스마트 폰 영상을 초딩 동창 밴드에 올렸더니 친구들의 탄성이 환청인 듯 내게 들려오는 듯 했다. 주말에 이렇게 타운에서 벗어나 보기도 얼마만인지.


지난 6월초에 비로소 두차례의 백신을 모두 맞고 한숨 돌리기까지 짧은 거리나마 드라이빙 하는 것조차 번거로이 여기며 살다보니 주말에 딱히 사는 타운을 벗어난 기억이 별로 없었다. 불과 2년전까지만 해도 주말이면 무작정 차를 몰고 산타크루즈로 내달려 보드워크 해변 테마파크를 거닐다 라벤더 향기 짙은 이름모를 카페의 패티오에서 런치를 하고는 1번 도로를 따라 운전하다보면 해질 무렵 페스카데로 해안 절경의 피전포인트 라잇하우스에 도착하곤 했었다.

등대 밑 호젓한 벤치에 망부석처럼 앉아 태평양 망망대해를 바라보며 두고 온 고향땅 인환의 거리에서 스쳐갔던 아름다운 추억들을 떠올려본다. 무단히 센치해진 나는 ‘이역만리 이곳에서 이렇게 늙어가는구나’ 하며 투정도 살짝 부려보는 것이다.

하와이 호놀룰루쯤 넘어간 저녁해가 만들어 내는 인적 드문 해안에서의 석양은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 잠시 넋을 잃고 바라보다 보면 사방은 이내 칠흑 같은 어둠에 잠겼다. 오가는 차도 별로 없는 절경의 퍼시픽 코스트 1번 하이웨이 시골길을 한참을 북상하다 보면 몬터레이 못지않은 아름다운 하프문 베이에 도착하게 된다.

이내 방향을 오른쪽으로 돌려 92번 도로를 타고 크리스탈 스프링스 저수지가 있는 울창한 산을 넘고 한때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하이웨이라 불렸다는 280 프리웨이를 만나 30마일가량 남하해 집에 도착하면 총 150마일의 훌륭한 일요드라이브의 추억을 쌓을 수 있었던 것이다.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지난 일요일엔 팬데믹을 핑계로 도저히 집근처에서만 맴돌 수는 없다는 강박감이 밀려와 나를 무작정 달리게 만들었던 것이다. 방향은 북쪽으로 잡았는데…. 하프문 베이 근처 야생화가 흐드러져 있을 이름 모를 절벽 해안길을 산책하며 하루를 보낼까 하다가 아무래도 사람들 구경하는 재미가 솔찬히 있을 샌프란으로 향했던 것이다.

유명한 롬바르드 꽃길 인근 케이블카 길에서 근 30여년간 리커스토어를 운영중인 팔순의 P 어르신께 오랜만에 인사드리고 꽃길도, 피셔맨즈 워프도 구경하며 하루를 보내면 팬데믹발 이런저런 상념에서 잠시나마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았다. 수십년 한국일보 독자님이신 이 어르신과의 만남은 참으로 귀한 인연이다. 5년 전인가 내 수필을 보시고 수소문해 전화를 주신 후 세대를 뛰어넘어 이런저런 지나온 인생이야기를 서로 나눌 수 있게 되었으니 이보다 더 아름다운 인연이 어디 있을까.

이 어른이 낯설은 미국으로 이민 와 수십년 생업전선을 꿋꿋이 지켜오신 뚝심을 생각하면 정말 존경하지 않을 수 없다. 이분처럼 (멀리 LA에서도) 귀한 전화를 걸어주셨거나, 우연히 토너먼트에서 한조가 돼 골프를 치면서 잘 읽었다며 코멘트를 해주신 분들이 내게는 열 손가락으로 셀 수 있을 정도 있는데 한분 한분 떠올려보면 정말 소중하고 귀한 분들이다. 내 인생에 이런 아름다운 인연들이 찾아오리라는 것을 상상이나 했을까.

백신을 맞고 나니 변이 팬데믹이 기승을 부리고 있긴 하지만,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을 마치면 누구나 하늘로 돌아가야 하는 것이 우리네 인생이다. 이렇게 아름다운 인연의 색실로 하트무늬를 뜨개질 해 날마다 조금씩 조금씩 키우듯 살 수 있다면 이세상 더 이상 바랄 것이 또 무엇 있을까.

<김덕환 실리콘밸리 부동산업체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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