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둑한 서재의 문을 들어서자 복잡했던 마음의 빗장이 스르르 풀린다. 마치 나를 내려놓고 빈 마음을 가져야 다시 채울 수 있던 고해실에 와 있는 듯한 선한 기운을 느낀다. 문득 세례후 첫 판공성사를 받던 때가 떠올랐다. 성탄절을 앞두고 반드시 거쳐야 했던 성사였으나 늘 사소한 감정조차 숨기는데 익숙했던 내가 자신을 드러내어 죄를 고백해야 한다는 사실에 몹시 불편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가슴에 간직했던 묵직한 것들을 드러내고 홀가분한 마음으로 고해실을 나서며 성사의 은총을 알게 된 날이었다.
서재에는 두개의 소파가 있다. 책상과 같은 계열의 짙은 와인색이다. 책상에서는 주로 쓰기 작업을 하거나 컴퓨터로 일을 하지만, 때로는 생각이 생각을 이어가지 못하고, 단어와 단어가 분리되어 글이 되지 못하면 소파에 앉아 음악을 듣거나 책을 읽곤 한다. 이 순간이 닫혀진 나를 벗어나게 하고 갇힌 사고에서 벗어나 나를 치유케 한다. 오늘도 꼬리를 문 상념들은 바흐의 선율을 타고 자유롭다.
어느해의 6월처럼 오늘도 6월의 햇살은 조용히 꽃들을 피워냈다. 창 너머로 장미가 피었던 것을 보고 감탄했던 지난해가 생각나서 창 밖을 바라보았다. 빛을 잃은 장미꽃 너머로 하얀 수국이 탐스럽게 피어 있었다. 훗날, 오늘은 아쉬움과 탄성이 교차되는 심사로운 6월의 어느날 이었다고 기억될 것이었다. ‘장미는 무엇을 보았을까? 장미가 하고 싶었던 말은 무엇 이었을까? 장미가 하지 않은 말을 수국은 알고 피었을까? 수국은 어떻게 세상을 읽어갈까?’ 나 스스로 장미가 되고 수국이 되어 묻고 대답하며 상념에 빠졌지만 역시 장미의 말도, 수국의 단어도 알 수 없었다.
늘 현재보다 과거의 어느날에 매달려 생각을 이어가는 것이 고쳐지지 않는 나의 오래된 습관이다. 오늘보다 예전의 기억들이 더 아름답게 보이는 까닭을 잘 모르겠으나 볼 수 없고, 가질수 없고, 만질 수 없는 것에 대한 그리움이라고 여기기로 했다. 늘 생각의 추가 과거에 머물다 보니 나를 스치며 오고 가는 현실의 행운을 놓치곤 한다. 장미를 아쉬워 할 일이 아니라 수국을 보고 감탄했었더라면 나는 지난해와 다른 새로운 아름다움을 찾을 수 있지 않았을까?
아침 일찍 홈디포에 들려 전기톱과 현관 앞 화분에 옮겨심을 일년생 꽃들을 샀다. 눈에 띄는 작은 야외 테이블도 사왔으니 조립도 해야했다. 하루라는 시간이 부족해 보였으나 내 일상 밖의 일을 하면서 느끼게 될 또 다른 치유의 시간이 기대가 되었다. 잔디를 깎거나 정원을 가꾸는 일은 늘 사람들을 시켰고, 꽃을 가꾸는 일은 아내가 좋아하는 취미라고 여기며 그동안 모른척 했던 일이었다.
그런데 지난 주에 웃자란 나무가 눈에 들어왔고 전지를 해보자는 아내의 제안에 전기톱까지 사오는 용기를 내게 된것이다. 처음하는 일이라 어설프고 조심스럽다 보니 톱을 쥔 손목에 힘이 들어갔다. 힘을 빼라는 아내의 말이 들렸으나 그럴수록 손에 힘이 더 들어갔고 어깨까지 뻐근했다. 일을 힘들게 한다고 아내는 잔소리를 했지만 익숙하지 않은 일이어서 몇곱절은 더 힘들었다. 눈 앞으로 땀이 흘러 내렸으나 시간이 흐를 수록 가지가 가지런히 정리되었고 가려져 있던 제 모습을 드러냈다. 어렵게 나무들이 제 모습을 드러내자 꽃 사이로 잡초가 눈에 들어왔다. 이제 주변의 잡초를 뽑아 주어야 꽃이 돋보일 것이었다. 머리를 숙여 잡초를 뽑다 수국 아래 죽어 있는 어린 새를 보았다.
버려진 죽음은 마음이 아프다. 어린새가 어떻게 살았고 어떻게 죽었는지 나는 모른다. 다만 언젠가 처마밑에 새가 둥지를 튼 흔적이 있어 청소를 부탁했었는데 아마 그 둥지에 살던 새가 떨어진게 아닌가 짐작할 뿐이다. 척박한 세상이지만 가장 아름다운 순간에 부른 어린 새의 노래는 오래도록 남아 있을 것이라 믿으며 나는 어린새의 상주가 되기로 했다. 큼직한 마른 잎으로 그의 몸을 감싸고 숲 속 나무 아래로 옮겨 주었다. 어린 새의 노래를 기억하는 것이 어찌 큰 나무 뿐이겠으나 어린새가 늘 머물고 싶었던 자리라 생각되었다.
이름 모르는 풀꽃을 잡초라고 부르며 뽑아 내다가 문득 내가 아는 이름의 꽃이 거의 없음을 깨닫는다. 적어도 나에게는 잡초와 꽃 사이에 경계가 없는 셈이어서 이름없는 잡초의 질긴 생명력이 신비롭고, 더 많이 안쓰러웠다. 그리고 그런 잡초를 뽑다가 마주한 어린새의 주검은 처연한 슬픔이었다. 살아 가려는 잡초와 버려진 어린새에서 온전하게 삶과 죽음을 목도한 6월의 어느 날이 그렇게 지나갔다.
벌써 올 한해도 반환점을 돌아 달려간다. 한차례 소나기가 내리더니 다람쥐 두마리가 사이좋게 땅에 내려와 흙냄새를 맡는다. 해질 무렵 시든 장미가 땅으로 툭 떨어졌다. 그렇게 풍경속에 숨어 있다가 풍경속에 사라져 가는 꽃은 끝내 한줌의 풍경속으로 숨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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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동선 수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