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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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고도 긴 쉼표

2021-07-03 (토) 김영수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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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모를 하얀 꽃잎에 내려앉은 주홍색 모나크나비 한 마리가 보인다. 대개는 무리 지어 다니던데 어쩌다 혼자일까. 제 몸만큼이나 가벼운 꽃잎에 몸을 부리고 숨을 고르는 쉼표 같은 시간, 찢긴 날개 끝이 흔들린다. 얼마나 고된 비행이었으면 날개가 저리 상했을까. 천릿길 회귀하는 상처투성이 어미 연어에게도, 날개 끝이 닳도록 수천 리를 날아온 나비에게도 삶은 녹록지 않은 여정이리라. 휴식하는 시간 위에 포개지는 햇살은 그 만만치 않은 삶을 달래주는 위로의 손길이 아닐까 생각하는데, 낯익은 과거의 한 장면이 스쳐 간다.

작업복을 입은 채로 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땀을 식히는 무리 중에 그가 있었다. 그들의 이마에 맺힌 땀방울이 하나로 모여서 가느다란 빗물처럼 흘러내렸다. 목에 두르고 있던 땀에 전 수건으로, 검게 탄 얼굴을 문지르며 웃던 그들의 치아가 햇살에 하얗게 빛났다. 공사 현장에서 근무하던 남편은 그 땀방울 속에서 살다시피 했다. 나는 그들의 땀을 통해 노동과 휴식이 균형을 이룰 때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보았다. 그리고 그 땀이 얼마나 고단한지도.

지하철을 타고 버스로 갈아타고, 선 채로 졸다 깨다 하며 집으로 돌아가는 길. 걸을 때마다 부스럭거리는 붕어빵 비닐봉지 소리가 그들에게는 하루의 유일한 행복이었다. 혹시나 하던 기대로 따뜻하던 붕어빵은 잠든 아이와 아내의 고른 숨소리에 밀려서 큰소리칠 기회를 번번이 놓쳤다. 아내는 아내대로 갓 지은 밥 냄새에 스며들 웃음소리와 식탁 한자리를 차지하게 될 행복을 상상하며 상을 차리곤 했다. 그녀에게 밥상은 단순히 허기를 달래는 공간이 아니었다.


소박한 마음으로 밥을 짓고 국을 끓이던 시간이 허망하게 식어가던 아내의 밤. 축축해진 붕어빵 봉지를 식탁에 내려놓고 식구들 깨울세라 발소리 죽여가며 이불 속으로 기어드는 남편의 밤은 아내의 밤을 만나지 못했다. 겨우 잠든 부부에게 속절없이 찾아와 거칠게 문을 열어젖히는 불투명한 새벽. 고된 밤, 다시 새벽. 또 밤, 다시 새벽... 숨 가쁘게 이어지던 내 남편과 나의 하루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노동과 휴식이라는 단어를 떠올리면 다가오는 시커먼 그림 하나가 있다. 고흐의 ‘감자 먹는 사람들’이다. 땀 흘려 일한 뒤에 주어지는 휴식이 갖는 의미는 백 년 전 그때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은가 보다. 하루의 긴 노동을 끝내고 저녁 식사하는 동안 말 한마디 없이 무표정하게 감자만 집어 가는 농부 가족의 거친 손이 어두운 배경에 흐릿하게 노출된다. 그림에서 보이는 단절의 벽은 어깨를 짓누르는 가난의 무게를 말하는 듯하다. 가난이 더께가 져서 어두울 수밖에 없는 방에서, 피곤에 지친 손과 손이 식탁에 모여 감자를 먹는다.

무겁게 움직이는 포크와 손놀림 사이에 내려앉는 침묵은 많은 이야기를 들려준다. 온 식구의 투박한 손으로 캐냈을 감자알에서 뿌연 김이 무심히 올라가는데, 누구의 얼굴에서도 휴식의 편안함이나 먹는 기쁨은 찾아볼 수 없다. 나는 그 수증기 너머의 고된 노동을 본다. 안온과 풍요 속의 일체감보다는 역경과 결핍으로 인한 균열에서 인간의 정서가 더 세밀하게 반응하며 움직이는가. 가난과 배고픔과 누추함과 비참함마저도 미화하지 않고 인간의 삶을 있는 그대로 표현한 작품이라서 깊은 공감을 끌어내는지 모르겠지만, 그림 속의 휴식은 여전히 아프다.

자연도 쉬어가는 계절 앞에 있다. 그 어떤 삶의 여정이라고, 고단한 육신을 부려놓고 휴식하는 순간이 달지 않을 수 있을까. 봄 여름 내내 바빴던 나무가 단풍으로 아름다운 것도 잠시, 낙엽 지면 가을이고 열매 떨구면 겨울이다. 봄이면 어김없이 새싹을 올리는 나무와는 달리, 한번 지면 그만인 인간은 나무라는 우주에 매달린 잎이나 꽃 같은 존재에 가깝다. 저마다 아름다운 꽃을 피우는 꿈을 갖고 산다 해도, 모두가 다 꽃과 열매를 거두며 살 수 있는 건 아니다.

잎과 꽃이 한 나무 안에 있어도 평범한 잎들은 꽃을 마음에만 품은 채 익명의 잎으로 살다 간다. 꽃은 한 생명의 절정이지만, 삶의 완성이라 할 수 있는 열매는 꽃이 져야 비로소 모습을 드러낸다. 꽃의 시간이 허공에서 순간을 머문다면 열매의 시간은 흙 속에 오래 묻혀야 제 역할을 한다. 잎들이 하나둘 떨어져 내리는 소리가 들린다. 어쩌면 열매나 잎의 낙하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쉼표가 들어있을지 모른다. 동그랗던 마침표에서 생의 의지가 싹트면 쉼표 모양이 되듯이, 마침표를 찍어야 그 뒤에 새로운 문장을 다시 시작할 수 있듯이. 떨어진 잎과 열매는 흙으로 돌아가 오래 휴식하며 순환을 거듭하리라.

젊은 시절에 나를 사로잡았던 꿈과 열정은 퇴색하고 균열하여 먼지가 쌓였지만, 더는 지난 일에 연연하지 않는 나이에 이르니 휴식의 의미가 새롭게 보인다. 누군가에게는 아쉽고 달콤한 휴식이,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시작을 위한 인고의 시간일 수 있는 인생의 휴식은 짧고도 긴 쉼표이어라. 열심히 달려온 끝에 한숨 돌리며, 쉬는 것으로 보여도 내면의 활동을 멈추지 않는 겨울나무의 쉼표를 닮은 나의 계절을 본다.

<김영수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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