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월8일은 유엔이 1977년 ‘세계여성의 날’로 지정한 날이었다. 남성 위주였던 과거 역사를 되돌아보고 지구 구성원의 절반인 여성들의 사회적 역할과 공헌 등에 대해 지구촌이 다 같이 생각해보는 기회를 갖자는 게 지정 취지였을 것이다.
미국은 여기에서 한발 더 나아가 1988년 레이건 대통령 시절부터 매년 3월 한 달을 ‘여성 역사의 달’(Women’s History Month)로 기념하고 있다.
‘여성 역사의 달’을 맞아 잊혀진 흑역사, 미국 여성의 참정권 역정을 따라가 보는 것도 의미가 깊다고 생각한다. 오늘날엔 너무나 당연하다고 여기는 여성의 투표권이 현대판 민주주의의 본산이라고 할 수 있는 미국에서조차 이를 공식적으로 인정받은 것은 그리 역사가 오래되지 않았다.
남북전쟁 후 1870년경 노예제를 폐지하고 흑인 남성들에게 투표권을 허용한 수정헌법 제13조~15조가 제정될 당시만 해도 미국 여성들에게는 재산권 행사뿐 아니라 투표권이 여전히 빠져있었다.
이에 여성 인권운동 선구자들은 다방면에서 실력을 행사하기 시작했는데 그중에서도 수잔 앤서니(Susan B. Anthony)의 공이 가장 컸다. 남녀평등을 중시하는 퀘이커 교도였던 앤서니는 1872년 실시된 대통령선거 뉴욕 주 로체스터의 투표장에서 자신의 동지 여성들과 함께 불법 투표를 한 혐의로 재판에 회부되었다.
법정에 선 그녀는 발언을 제지하는 재판장의 거듭된 명령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미국 정부가 받아야할 심판을 왜 거꾸로 내가 대신 받아야하는지, 아울러 미국 시민이 자기 대표자를 뽑는 투표를 하는 게 왜 죄가 되는지 나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고 당당하게 항의했다.
그녀는 결국 벌금 100달러 형의 유죄선고를 받았지만 벌금 납부를 거부하고 투표권 운동에 매진함으로써 미국 여권 운동계의 아이콘으로 길이 남게 되었다. 비록 앤서니는 투표권의 완성을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지만 후세에 와서 기념우표나 1달러짜리 기념주화의 모습으로 환생하기도 했다.
앤서니 이후 반세기 동안 여성계의 집요한 공세에도 꿈쩍 않던 여성참정권 문제가 미국의 제1차 세계대전 참전을 계기로 그 실마리를 찾게 된다. 당시 대통령이었던 우드로 윌슨은 미국 참전의 대의명분으로 안전한 민주주의 수호를 천명했는데 이것이 논쟁을 점화시켰던 것이다.
여권운동가들은 “자국민의 절반인 여성을 민주주의 사각지대에 방치하고 있는 나라에서 남의 나라 민주주의를 지켜주겠다고 해외에까지 나가 청년들 피를 흘리게 하는 게 말이나 되는 소리냐”고 미국 남성들의 정서를 전방위로 자극했다. 이것이 주효하여 마침내 종전 직후인 1919년, 수정헌법 제 19조가 의회를 통과하게 된다.
“미국 시민의 투표권은 성별로 인하여 미합중국이나 주에 의하여 거부 또는 제한되지 아니한다”라는 짤막한 한 문장으로 지난했던 투표권 문제에 종지부를 찍게 된 것이다.
코로나-19 팬데믹의 와중에도 수정헌법 제정 101주년이 되는 올해 3월은 그 의미가 특별하다. 3권 분립이 확고하게 자리 잡은 미국 땅에서 행정부에서는 카말라 해리스(Kamala Harris)가 여성 최초로 미국 부통령이 되었다.
100년 전에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입법부에서는 낸시 펠로시(Nancy Pelosi)가 미국 권력 서열 3위인 하원의장으로 재선되는가 하면 총 하원 의석 435명 중 역사상 최고 많은 숫자인 118명(27.1%)의 여성이 하원에, 상원 의석 100명 중 24명이 상원의원으로 진출했다.
또 정치에 휘둘리지 않고 연방국가인 미합중국이 나아갈 진로를 제시하는 연방대법원의 대법관 총 9명 중 3명의 여성이 대법관 자리를 차지했다. 아직 갈 길은 멀지만, 천지개벽할 정도로 여권이 신장된 한 세기 역정을 되돌아보는 감회가 새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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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경락 변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