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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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슴이 시리다

2021-03-01 (월) 박명혜 전 방송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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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나이가 꽤 많은 동네에 살고 있다. 그렇다고 이 마을이 생긴 지 백년을 넘겼다거나 특별한 역사가 있는 것은 또 아니다. 그저 마을이 만들어지기 전부터 있었던 나이 많은 레드우드와 오크 트리 때문에 내가 그리 느끼는지도 모르겠다. 이사 오던 날, 옆집 이웃은 토박이라 말하며 이 지역에 대해 무엇이든 물어보라 말했었다. 꼭 그의 자신 있는 말투 때문이 아니더라도 사십여 년을 한곳에 살며 경험해 얻은 지혜는 한 번 믿어볼 만하단 생각을 했다. “역사란 현재와 과거의 끊임없는 대화”라는 에드워드 카의 말처럼 과거를 제대로 아는 것이 현재를 바로 살 수 있게 하는 좋은 방법 중 하나일 테니까 말이다.

하버드 대학교의 한 교수가 위안부 피해자들을 매춘부로 규정해 논문을 썼다. 기사를 읽고 또 읽으며 순서 없는 생각들이 떠올랐다. 그는 왜 이 주제로 논문을 썼을까? 대체 어떤 연구 방법이 이런 결과를 뽑아냈을까? 경험하지 못한 역사적 사실을 알기 위해 위안부 피해 당사자를 단 한 분이라도 만나봤을까?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은 타인에 대한 원망에서 시작돼 우리 자신에 대한 부끄럽고 불편한 상황들에 멈춘다.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는 얼마나 제대로 이 세상에 위안부 피해자들에 대해 설명했는가? 아픔을 진심으로 공유하고 있는가? 성장과 발전이라는 화려한 현재에 빛바래 희미해진 과거를 자꾸 안 보이는 곳으로 밀어 넣고 있었던 건 아니었을까?


이 논문 기사가 실린 며칠 후 위안부 피해 최고령 생존자였던 정복수 할머니의 부고 기사가 떴다. 이제 피해 생존자로 남아계신 분들은 모두 열다섯 분. 많은 연세에도 하루하루 자신의 삶으로 역사를 증명하며 살고 계신 분들께 우린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나이 많은 우리 동네는 지난해부터 안전을 위해 오래된 나무를 자르고 있다. 오늘도 꽤 한참 동안 날카로운 톱질 소리가 들리더니 나이 많은 레드우드 한그루가 누웠다. 한그루밖에 베지 않았는데도 하늘을 엄청 넓혀놓았다. 누운 나무 위로 보이는 하늘이 오늘은 유독 시리도록 푸르다.

<박명혜 전 방송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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