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친구의 친구 손자’가 백신 예약

2021-02-25 (목) 안상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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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 북쪽 엔시노의 한 부부가 인근 공원의 체육관 앞에 줄을 섰다. 백신 예약을 신청하는 줄이었다. 80대 남편은 보행기에 의지해 차례를 기다렸다. 한참 후 이들 부부는 접종일을 잡을 수 있었다. 서로 다른 날짜였지만 운이 좋았다고 할 수 있다. 직접 가면 예약이 가능한 시스템이었으니까.

LA의 한 여성은 새벽 2시30분에 일어나 책상 앞에 앉았다. 전화기 2대와 컴퓨터 2대부터 켰다. 집에서 수 천 마일 떨어진 한 수퍼마켓의 사이트에 접속하기 위해서 였다. 이 마켓 체인은 65세이상 플로리다, 조지아, 사우스 캐롤라이나 주민에게 접종을 제공하는 곳이었다. 그녀의 손에 들린 예약 후보자 명단은 12명. 부모와 이모의 예약을 대신해 드린 후 플로리다에 사는 부모님 이웃들의 부탁이 몰려 왔다. 거절하기 어려웠다. 도서관 사서인 어머니의 직장 상사도 포함돼 있었다.

문제는 예약이 절망적일 정도로 어렵다는 것이다. 빈 자리는 나오자마자 금새 사라졌다. 백신 예약이 코첼라 뮤직 페스티벌 티켓 예매 보다 더 힘들다고 서른살의 이 여성 작가는 고개를 저었다.


현재 시니어 우선 접종을 하고 있는 주는 캘리포니아 등 최소 35개 주에 이른다. 이 지역에서는 새벽잠을 설친 노인들이 적지 않다. 트래픽이 적게 몰리는 시간에 예약을 하려 하기 때문이다. “3주 반만에 예약할 수 있었어. 차 타고 4시간을 가야하는 곳까지 시도했었지. 정말 컴퓨터를 창 밖에 던져버리고 싶더군”. 플로리다의 한 70대 시나리오 작가는 말했다.

예약하느라 밤 1시까지 꼬박 컴퓨터 앞에 앉아 있었다는 뉴욕의 한 노인은 “늙은이들에게 너무 심한 것 아냐”하며 울음을 삼키더라고 한 TV 방송은 전한다.

80대 부모의 예약에 나선 딸은 백신 예약은 풀타임 노력없이는 불가능한 일인 것 같다고 한다. 그녀와 조카, 조카의 여자 친구까지 세 사람이 수시로 인터넷 사이트를 업데이트 하고, 약국에 전화를 하고, 집 가까운 병원은 직접 찾아 다니며 예약가능 여부를 알아본지 며칠이 지났지만 아직 성과가 없다는 것이다.

‘예약 대란’이라면 과장이겠으나 부탁할 곳이 마땅찮은 노인들은 예약때문에 애가 탄다. 어려움의 정도는 지역과 예약처에 따라 많이 다르다. 남가주에서도 오렌지카운티는 확실히 LA 보다는 예약이 쉬워 보인다. 어디다가 예약하느냐에 따라서도 차이가 크다. 어떤 동네의 약국은 기다릴 필요없이 접종이 바로 가능했던 반면, 또 다른 지역에서는 한참을 기다려야 했다.

요즘은 예상하지 못했던 한파 때문에 백신 운송에 어려움이 가중되면서 신규 예약은 고사하고, 돼 있던 예약이 취소되기도 한다.

보건당국이나 의료기관 등이 기존의 사이트를 통해 예약을 접수할 경우 문제가 많다. 수 만, 수 십만명이 동시 접속할 것을 염두에 두고 디자인된 사이트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카운티에 따라서는 스타트업 기업에 예약 업무를 전담시키기도 한다. 예약과 함께 다중 언어 번역 서비스와 채팅 문의도 가능하도록 했다. 비영리 단체가 지역 의료센터를 돕기 위해 콜 센터역을 자임하고 나선 곳도 있다.

워싱턴 포스트지의 한 기자는 얼마 전 그가 겪은 백신 예약 체험담을 나눴다.


… “어떻게 하는지 도통 알 수가 없어. 나뿐 아니라 내 친구들이 모두 그래”. 시카고 근교에 혼자 사시는 79세의 어머니는 접종 예약을 할 수 없다고 호소했다. 원격으로 가능한 일인지, 소프트웨어 엔지니어인 누이에게 이야기해야 겠다고 생각했다. 얼마 뒤 어머니가 다시 전화했다. “첫 번째 주사는 맞았어!”. 아니, 어떻게 예약이 가능했을까. 알고 보니 어머니 친구의 친구 손자가 대신해 드렸다고 한다. 13살이라고 한다.

소년에게 전화를 했다. 소년의 어머니와 세 사람이 줌으로 연결했다. “몇 사람이나 예약을 도와 드렸니?” 28명쯤이라고 어머니가 말했다. “시간은 얼마나 걸리든?” . 어떤 날은 3시간씩 전화에 매달린 때도 있었다고 어머니가 대신 말했다. “엄마, 그 시간에 다 그것만 한 건 아니야”. 소년이 어머니의 말을 고쳤다.

8학년인 소년은 온라인 수업을 들으면서 예약을 했다고 한다. 소년의 어머니도 처음 듣는 말이었다. “어떻게 그게 가능하니?”. 사이트 몇 개를 켜놓고 계속 업데이트 하긴 했으나, 자판만 바람처럼 두들긴다고 되는 일은 아니었다.

소년은 서로 다른 각처의 예약 시스템을 연구했다. 한때 트위트 계정이나 여러 예약처를 한데 모아놓은 사이트가 유용했으나 보안 문제로 모두 폐쇄됐다. 백신 공급처에 따라, 각 정부기관에 따라 예약 전략은 다 달랐다. 인내심을 갖고 예약 사이트가 어떻게 작동하는지 완전히 파악한 후 예약했다고 소년은 말했다”…

이 소년이 말하는 ‘서로 다른 예약 전략’이 무엇인지 알 길이 없다. 하지만 접종 예약은 이민자뿐 아니라 영어에 전혀 문제가 없는 미국 노인들에게도 어려운 일이라는 것만은 확실하다. 남의 집 손주가 남의 집 할머니들의 예약을 돕고 있다. 각 가정의 젊은이들이 해야 할 일이 하나 생겼다.

<안상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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