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오페라의 ‘투란도트’의 한 장면. SF 오페라는 1977년 파바로티와 함께 ‘투란도트’를 공연하여 세계적인 주목을 받은 바 있다.
불과 20여년 전만해도 우리가 살고 있는 베이지역은 미국내의 가장 살고싶은 도시 중에서도 탑으로 꼽히는 도시였다. 지금은 주거비 상승, 혼잡한 거리, 공기 오염 등으로 샌디에고, 시애틀 등에도 못 미치는 수준으로 추락했지만 항구 도시 샌프란시스코는 여전히 머리에 꽃을 꽂으라는 말이 있을만큼 아름다운 경관을 자랑하고 있는 도시다. 특히 금문교를 위시해 알카트라즈 섬 등이 내려다보이는 러시안 힐에서 바라보는 샌프란시스코의 모습은 뭇 사람들의 시선을 붙들어 두기에 충분한 세계적인 미항의 장관이 아닐 수 없다. 또한, 샌프란시스코의 자랑거리는 아시아권 밖에서는 가장 크다는 차이나타운이 시내 한 복판에 자리잡고 있다는 점이다. 홍콩, 중국 본토 등에서 직수입되는 중화권 문화를 편히 앉아서 직, 간접적으로 체험해 볼 수 있는 도시는 미국내에서도 그리 흔치 않다. 샌프란시스코는 날씨가 온화하여 지중해 기후를 선호하는 이태리인들이 많이 살고 있는 도시로도 유명하다. 덕분에 일찌감치 오페라가 성행하여 뉴욕 다음으로 큰 오페라 컴퍼니를 거느린 도시다. 물론 세계 각 도시마다 오페라 하우스가 있기는 하지만 샌프란시스코 오페라는 배우 리처드 기어가 나온 영화 ‘Pretty Woman’에서도 등장할만큼 유명세를 타고 있다. 특히 중국을 배경으로 한 ‘투란도트’ 공연의 경우 표를 구하기 힘들정도로 압도적인 인기를 과시하곤 하는데 ‘투란도트’를 공연할 때 극장이 있는 밴네스 거리를 지나다보면 사람들로 북새통을 이루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그 속에는 중국인도 있을테지만 이태리인과 미국인, 그리고 향수를 찾고자하는 또 다른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멀리 떨어져 있지만 또 가장 가까이서 중국을 체험할 수 있는 도시… 바로 샌프란시스코이기 때문이다.
지난 주는 푸치니의 ‘투란도트’를 보면서 이국에서 보내는 구정 분위기의 쓸쓸함을 달랬다. ‘투란도트’는 중국적인 분위기를 최대한으로 살린 오페라이기 때문에 음악은 제쳐두고 무대만 보고 있어도 동양적인 향수를 느낄 수 있는 특색있는 작품이다. 다소 신비주의적인 요소를 담은 오페라이기도 한데 오페라 컴퍼니마다 색다른 의상과 무대 디자인을 보는 것만도 쏠쏠한 재미다. 아이러니하게도 지금까지 봐 온 최고의 ‘투란도트’ 무대는 샌프란시스코 오페라의 무대였다. 물론 웅장하고 화려한 맛으로 따지면 뉴욕 멧츠, 라 스칼라 등의 오페라가 최고지만 조명이나 연출, 창의성이 돋보이는 무대를 꼽으라면 샌프란시스코 오페라도 결코 뒤지지 않는다. 아쉽게도 유튜브 등에 나와있지 않아 함께 공유할 수는 없지만, 대신 2017년에 공연된 (영국) 로얄 오페라 무대도 꽤 괜찮은 무대로서 추천하고 싶은 작품이다.
‘투란도트’는 1926년 라 스칼라에서 초연된 이후 세계 각국에서 경쟁하다시피 다채로운 무대를 펼쳐 왔는데, 2003년에는 서울 상암 월드컵 구장에서의 야외 무대가 관심을 끈 바 있었다. 자금성 공연을 이끈 장이머우 감독이 연출을 담당했는데, 680여명이 출연했고 무대폭이 무려 150미터나 되는 대형 프로덕션이었지만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매우 죽쑨 무대였던 것으로 알려졌다. 장이머우 감독은 1998년 자금성에서 주빈 메타(지휘자)와 함께 ‘투란도트’ 무대를 이끌었는데 역사적인 건물을 배경으로 투자한 인력과 예산에 비하면 역시 죽쑨 무대로 평가받고 있다. 유튜브에서 영어 자막과 함께 나와 있는데 크게 추천할 만한 무대는 아니며 다만 ‘투란도트란 무엇인가?’ 개념을 엿보기에 무리없는 수준이다. ‘투란도트’ 이야기는 널리 알려져 있다시피 중국 전설시대의 공주 투란도트가 3개의 수수께끼를 통해 왕자들을 도륙(?)하는 무시무시한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중국적인 분위기를 느낄 수 있는 음악과 함께 1막에서 매우 신비적인 느낌이 드는 투란도트가 등장하는데, 이때 투란도트는 단 한마디의 노래도 부르지않고 다만 스쳐 지나갈 뿐이다. 내용상으로도 그렇고 전체적 분위기를 이끌어가는 1막에서 무대가 받쳐주지 않으면 ‘투란도트’의 전체 줄거리는 전혀 먹혀들거나 실감이 나지 않는다. 로얄 오페라는 1막에서 신비감을 줄 만한 어떤 특징있는 무대를 선보이지 못했지만 막이 전개될 수록 중국적인 것을 살리려고 최대한 노력한 흔적을 엿볼 수 있는 무대로서 나름대로 합격점을 받은 작품이었다. 이외에도 유튜브에는 뉴욕 멧츠와 서울 예술의 전당 등에서 공연한 무대가 나와있지만 멧츠 무대는 자막이 없는 게 아쉽고 예술의 전당은 성악이 미달이다. 중국 국립 오페라의 무대도 안정적인 공연을 보여주고 있지만 중국인이 만든 무대치고는 신비감이 너무 부족하다. ‘투란도트’는 이태리인의 관점에서 보는 중국이기 때문에 ‘라 스칼라’의 연출을 따라 올 만한 ‘투란도트’는 아직 출현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마르코폴로의 영향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서구에서 가장 먼저 중국적 오리엔탈리즘에 열광(?)한 나라는 이태리였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청나라의 마지막 황제를 그린 영화 ‘The Last Emperor’(1987년)가 이태리 감독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에 의한 이태리 영화였다는 사실은 알만한 사람은 다 아는 이야기다. 그 보다 반 세기 앞선 푸치니의 ‘투란도트’ 또한 이태리인들의 중국에 대한 오리엔탈리즘의 극치를 보여준 서정 오페라의 결정판이었다. 오리엔탈리즘이란 서구에는 없는 것이 중국에는 있다는 식의 서구인들의 관점에서 본 동양에 대한 동경을 말한다. 마술과 비술… 뭐 그런 신비적인 것도 있지만 황제의 절대 권력 아래서 복종하는 인간 군상의 비열한 모습 등 다소 부정적인면도 있고 동양만의 황홀한 문화… 이런 것들이 얽키고 설켜 그들만의 하나의 판타지를 만들어 낸 것이 오리엔탈리즘이며 ‘투란도트’이기도 했다. 물론 서구인의 관점에서 보는 중국의 모습이란 중국인이 보는 관점과는 다르고 비난의 여지도 있지만, 중국을 가 보지도 않았고 또 중국에 대한 확실한 지식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어딘지 몸 속에 흐르는 향수라고나할까, 늘 동경으로 다가오는 나라가 중국이기도 하다는 점은 같은 동양의 피를 나눈 우리에게서나 푸치니같은 서구인에게서나 마찬가지였던 것 같다.
푸치니는 18세기 베네치아의 작가 카를로 고치가 쓴 "투란도테 (Turandotte)"란 우화극을 보고 바로 대본 초안 작업에 들어갔으며, 이전과는 비교도 안될 정도의 초인적인 열정과 엄청난 노력을 쏟아부었다. 후두암으로 발목이 잡히면서 미완성으로 끝나고 말았지만 후배 프랑코 알파노에 의해 완성된 ‘투란도트’는 1926년 토스카니니에 의해 밀라노에서 초연되어 5번의 커튼 콜을 받을만큼 압도적인 성공을 거두었다. 오페라라는 장르는 요즘도 만들어지고 있지만 사실상 고전으로서 블록버스터급 오페라는 푸치니의 ‘투란도트’가 마지막이었다. 20세기는 푸치니의 등장과 더불어 그 종말을 고했던 오페라의 암흑기였기도 했다. 서구는 푸치니 이후 그 계보를 이을만한 어떤 오페라 작곡가도 탄생시키지 못했는데, 그것은 영화라고 하는 새로운 대중 매체의 등장으로 빚어진 필연적인 귀결이었는지도 모르지만 오페라는 영화의 출현과 더불어 자연스럽게 그 쇠퇴기를 맞게 되었다. 그러나 오페라는 영화가 줄 수 없는 나름대로의 감동이 있었다. 물론 오페라는 오케스트라와 성악이 빚어내는 극적인 감동같은 것도 있었지만, 무대예술이 주는 시각적인 감동 또한 오페라만이 줄 수 있는 종합예술의 독특한 일면이었다. 샌프란시스코 오페라가 한 때 오페라의 메카 ‘라 스칼라’와 더불어 세계 오페라의 중심축이 될 수 있었던 것은 70년도 중반부터 활약했던 파바로티, 마릴린 혼, 도밍고, 몽세라 카바예 등 일류 가수들의 활약 덕도 있었지만 베이지역 연출가들의 창의적인 무대와 그 예술적인 역량도 한 몫했다. 밋밋하고 변화 없는 무대의 향연은 오페라에서 김빠진 맥주나 다름없다. 오페라 무대란 한 작품당 막대한 예산이 지출되기 때문에 작품의 대부분은 타 오페라에서 쓰던 무대를 빌려오기 마련이지만 ‘투란도트’, ‘아이다’ 등과 같은 인기 작품들의 경우에는 각기 자신들의 무대를 제작해서 사용 할 수밖에 없다. 소위 좋은 오페라 컴퍼니란 무대와 가수 그리고 특징있는 프로덕션을 말하는데 SF 오페라가 시장에 내놓은 ‘라보엠’, ‘토스카’ 그리고 ‘투란도트’는 압도적인 무대였다. 그리고 보이토의 ‘메피스토펠레’, ‘아프리카의 여인’ 등도 히트작으로 세계 시장에 내놔도 전혀 손색이 없는 기념비적인 작품들이었다. 이밖에도 ‘아이다’, 바그너의 ‘링 사이클’, 베를리오즈의 ‘트로이 사람들’과 같은 작품들도 세계적인 무대로서의 역량을 과시한 바 있는데, 70년도 중반 파바로티와 함께한 ‘아이다’ 등이 유튜브에 나와 있어 당시 화려했던 SF 오페라의 공연 흔적들을 엿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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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훈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