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주병 마개 따는 소리가 경쾌하다. 나는 술을 거의 마시지 못하지만, 혼자 있을 때 맥주 몇 모금 마시는 정도는 좋아한다. 잔 가장자리에 입술이 닿을 때쯤 기포 몇 개가 터지면서 얼굴에 느껴지는 이슬 같은 촉촉함과 쌉싸래한 향이 좋다. 어쩌면 맥주와 함께하는 그 ‘잠깐 멈춤’의 시간이 좋은지도 모르겠다. 거품 사이로 차가운 액체가 목으로 넘어갈 때의 느낌은 설명하기 어려운 희열이다.
조용히 맥주 한 모금 들이킬 때의 차갑고도 따스한 행복감, 부드러운 만족감, 그 모든 느낌을 합하여 한 단어로 표현할 수 있을까. 세계에서 가장 행복한 국민이라는 덴마크인이 누리는 행복의 비결은 휘게 문화라고 한다. 휘게(Hygge)는 일상에서의 작은 즐거움, 또는 소박하면서도 여유로운 삶의 방식을 말하는 덴마크어다.
조급함이나 소란스러움과는 거리를 두는, 정적(靜的)이고 자연 친화적이면서도 인간 냄새나는 단어라 할까. 멀리 가지 않아도 특별하지 않아도, 평범한 일상에서 얼마든지 행복을 맛볼 수 있다는 의미 같다. 휘게, 하고 발음하면 커피나 맥주 한 잔 앞에 놓고 담소하며 공감대를 이루는 분위기가 먼저 그려진다. 다사로운 공간이 주는 영향력을 생각지 않을 수 없다.
충격에 가까운 큰 기쁨은 잠시 머물 뿐이지만 작은 데서 맛보는 여운이 오히려 오래 가더라는 기억 때문인지, 행복은 일상 속에 있다는 말이 설득력 있게 다가온다. 오래전 그때를 생각하면, 그들 부부의 따스함과 여유로움이 문득 그리워진다.
완만한 언덕 숲길을 오 분쯤 걸어오르면 나무로 지은 게스트하우스가 있고 그만큼 더 올라가면 붉은 벽돌집이 보였다. 내가 룸메이트와 같이 그곳에 갔을 때는 한겨울, 눈 덮인 언덕에 나무마다 눈꽃이 피어있었다. 투박한 나무문을 열면 풍경 소리가 울리면서 빵 굽는 냄새가 성큼 달려 나왔다. 벽난로에서 타오르는 불꽃을 보기만 해도 얼었던 몸이 풀리면서 마음마저 훈훈했다.
은퇴한 노부부가 사는 집이었다. 그들은 여행객에게 식사를 챙겨주고 게스트하우스 빌려주는 일을 했다. 식사는 대개 할머니가 준비했는데 오븐에 구운 허브향이 배어있는 닭고기는 번번이 입맛을 사로잡았다. 맛있는 음식을 먹은 날 밤에는 고국에 있는 아들이 그리워 베갯잇을 적시곤 했다.
그래서 그랬을까. 자작나무 타는 소리를 배경으로 포크와 나이프 소리가 간간이 섞여드는 가운데 조용한 대화가 이어지던 시간이 잊히지 않았다. 그곳을 떠난 뒤에도 가끔 그들과의 식사 장면을 떠올릴 때면, 와인이나 맥주잔을 기울이던 식탁 풍경이 조용히 다가오며 그때의 감정에 젖어 들곤 했다.
두 분이 사별과 이별이라는 아픔을 겪은 노경에 이르러 각각 여행을 떠났다가 호주 시드니의 오페라하우스 연주회에서 만나 인연을 맺은 부부였다. 떠날 때는 혼자였지만 미국으로 돌아올 때는 함께였다며 할머니 어깨에 손을 얹고 있던 할아버지가 한쪽 눈을 찡끗했다.
벽난로 잉걸불 위에 장작 몇 개 더 집어넣더니 어느새 밖에 나가 눈 치우는 남편의 뒷모습을, 부엌 창문 너머로 내다보는 할머니 눈빛이 아련했다. 한 달 남짓 그들과 생활하던 아늑한 공간이 먼 기억 속의 시간에 저장되었다가 되살아나면 휘게라는 단어가 생각났다.
우리 부부는 가끔 동네 카페에 가곤 했다. 커피를 마시며 소소한 이야기를 나누거나 각자 스마트폰 세상으로 들어가 자신만의 시간을 즐길 수 있었다. 집에서는 거의 말없이 지내면서도 카페 분위기 덕인지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던 시간이었다. 잔잔한 음악이 흐르고 구운 빵 냄새와 커피 향이 감도는 공간의 선물이었다고 할까.
혼자일 때에는 책을 읽거나 글을 쓰기도 하는데, 은은한 조명 아래 앉아 있는 것만으로도 사색의 길이 열리면서 시간이 훌쩍 지나곤 했다.
지금 같은 팬데믹 사태에서는 이 모두가 멀어진 꿈이 되었지만 눈 내리는 날이나 비가 오는 날엔, 자연에서보다는 카페에서 이야기 나누는 시간을 나는 좋아한다. 함께하는 공간은 시간만큼이나 중요한 역할을 한다. 코끝을 자극하는 강한 커피 향을 머금은 블랙커피나 부드러운 카푸치노 거품이 스산한 기분을 달래주리라는 기대 때문일까.
‘공간이 사람을 움직이고 마음을 지배한다’는 어느 공간 심리학자의 말처럼, 같은 이야기도 어떤 공간에서 누구와 나누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커피 한 잔에 햇볕을 담은 아늑한 공간에서 그녀 또는 그와 담소하는 시간이 휘게라는 단어와 함께 언제라도 내 삶에 들어오도록 문을 열어둔다. 조용하게 교감하며 하나가 되는 그 맛이 좋아서. 마음이 촉촉해지고 굳었던 감성도 낫낫하게 풀리는 느낌이 좋아서 나는 내 마음의 문이 열려있는지 돌아보는 것이리라. 그 작은 행복을 다시 누릴 수 있는 날을 기다리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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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수 수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