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오늘 하루 이 창 열지 않음닫기

검은콩 나물

2021-01-30 (토) 송윤정 금융전문가
크게 작게
2021년 새해를 맞으며 일주일에 한 번은 새로운 것과 새로운 요리를 시도해 보자 마음먹었다. 첫 주에 콩나물을 길러보는 것으로 시작했다.

몇 년 전에 시어머님께서 오셨을 때 한국식으로 콩나물 기르는 것을 배운 적이 있었다. 물이 고이지 않고 통과할 수 있는 소쿠리에 콩을 담고 밑에 걸러진 물을 받을 수 있는 큰 통을 놓은 후, 아침 저녁으로 하루에 두 번씩 물을 골고루 붓고 검은 천을 덮어 놓았다. 노랗고 연한 콩나물을 키우기 위해 햇빛을 받아 엽록소로 초록이 되고 강해짐을 막으면서 통풍이 되어 썩지않도록 하는 것이다. 하루 이틀만 지나도 싹이 나기 시작해 일주일만 지나면 수확해 먹을 수 있었다. 하지만 한 구석에 큰 통이 서 있는 것이 미관상으로 보기에 자꾸 눈에 걸렸고 밑에 고인 물을 처리하는 것도 수고스러워 그 이후엔 다시 해보지 않았다.

이번에는 날마다 날아오는 <농부 달력> 이메일에 농사 관련 경험과 지식을 나누는 영국인의 방식을 따라 보기로 했다. 뚜껑이 있는 네모난 과일 주스 빈 통에 12시간 정도 불려 깨끗이 씻은 콩을 넣은 후 양쪽 코너에 작은 구멍을 내고 아침 저녁으로 물을 준 후 그 구멍을 통해 물을 버리는 것이다. 일주일 후 통을 열면 콩나물이 가득 자라있는 그의 비디오를 보고 나도 당장 실행에 옮기기로 했다. 오렌지 주스 빈 박스를 물로 몇 번 씻어내고 콩을 찾으니 집엔 검은콩밖에 없는 게 아닌가. 검은콩이면 어떠랴. 검은콩이 몸에 더 좋다는데. 검은콩을 씻어 바쁜 마음 탓이었는지 열두 시간을 두 시간으로 잘못 기억해, 두어 시간 불린 후 충분하다 싶어 통에 넣었다.


물을 줄 때마다 뚜껑 구멍을 통해 들여다보았다. 이틀 정도 지나니 싹이 조금씩 나오기 시작하고 그 후로는 부쩍부쩍 자라는 것이 눈에 띄었다. 처음에 많이 불리지 않아서인지 나는 열흘이 되는 날 주스 통 위를 잘라 수확했다. 통을 열고 보니 두 가지 사실에 놀랐다. 검은콩의 껍질이 벗겨지고 자란 콩나물의 머리는 여느 콩나물처럼 노란 빛깔이었다. 또한, 한 줌의 콩이 같은 공간에 같은 환경과 물을 받았음에도 어떤 콩은 아예 싹도 피우지 않고 콩마다 나물이 자란 정도가 다 제각각인데 가장 잘 큰 것들은 자신의 콩껍질을 벗어던지고 머리가 노랗게 된 것이었다.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영광은 꽃과 같다”(벧전 1:24)라고 성경엔 곳곳에서 사람을 풀에 비유했고 동양의 노자는 심지어 “인생은 풀에 맺힌 이슬과 같다”고 했다. 시작을 알 수 없는 이 광활한 우주에 한 백년 있다 사라지는 사람의 육체는 정말이지 잠시 피었다 지는 풀이나 맺혔다 사라지는 이슬과 같을진대 콩과 사람이 얼마나 다르겠는가. 검은콩이나 누런 메주콩이나 껍질을 벗고 나면 노란 본체가 같듯 사람도 겉에 드러난 색과 관계없이 그 본체는 같지 않은가. 흑인의 인권을 위해 노력하다 백인우월주의자 제임스 얼레이의 총탄에 맞아 서른 아홉 살에 세상을 떠난 마틴 루터 킹 데이가 있는 1월이어서인지 검은 콩껍질에 나의 생각이 머물렀다.

마틴 루터 킹 목사는 “이 세상에서 가장 위험한 것은 고집스런 무지와 양심의 우둔함”이라 했다. 고집스럽게 자신의 껍질을 벗지 못한 검은콩은 자신을 내려놓고 껍질을 연 콩들이 싹을 틔우고 날마다 자라는 동안 속으로 썩어만 가고 결국 문드러진 모습으로 버려졌다.

잘 자란 콩나물을 씻어 무와 양파, 지난 가을 만들어 놓은 천연 조미료를 넣어 국물을 내고 팔팔 끓을 때 콩나물을 넣어 콩나물국을 만들었다. 한겨울에 따뜻한 콩나물국에 고추장을 풀어 먹으니 임금님 수라상이 부럽지 않다. 콩과 같은 작은 미물이라도 제 할 일을 다해 콩나물을 키워내 이런 기쁨을 주니 세상의 모든 존재가 제게 주어진 일을 다 한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팬데믹은 수그러들 기미가 없고 지난 1월 6일에는 민주주의의 상징으로 여겨지던 미국의 국회의사당에 백인우월주의자들이 난입해 난동을 부려 온 세상이 어수선한 때이지만, 제 할 일을 다하는 모든 존재가 세상을 지탱하리라.

2021년은 소의 해다. 소는 강인한 힘을 지녔음에도 유순하고 제 할 일을 우직하고 성실히 다해 온 세상 어느 곳에서나 사랑받는 존재다. 나도 올해는 콩이 자신의 껍질을 깨고 물을 받아 싹을 내고 키우듯 좁은 나 자신을 내려놓고 나에게 주어진 일을 다 하리라.

<송윤정 금융전문가>

카테고리 최신기사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