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 초 연방 의사당을 침공한 백인폭도들의 무지막지한 난동에 기가 찼다. 광화문 광장을 뒤덮는 촛불이나 태극기 시위는 시위도 아니었다. 참담했던 마음이 2주후 다른 SNS 동영상을 보고 풀렸다. ‘터미네이터’ 액션스타 아놀드 슈워제네거가 초대형 드라이브스루 클리닉으로 변모한 LA 다저스 야구장을 찾아 장시간 차 안에서 기다렸다가 코비드-19 백신을 접종받는 모습이었다.
미국인들은 당연하게 여길지 모르지만 ‘꼰대’ 한국인인 내 눈엔 신선하게 보였다. 슈워제네거는 삼척동자도 알아보는 할리웃 수퍼스타일 뿐더러 미국에서 가장 큰 캘리포니아 주지사를 연임한 정치인이다. 불과 10년전까지 주지사였던 그가 일반 노인들과 똑같이 처신한 게 신통했다. 한국에선 정치인들이 백신을 먼저 접종받으려고 미국여행을 꾀한다는 루머가 나돌았었다.
슈워제네거는 평소 마스크 착용과 사회적 거리두기 등 방역캠페인에 앞장서왔다. 같은 공화당원인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에게 초동방역 실패 책임을 지라고 따졌다. 그는 20일 접종을 받으면서 “살고 싶으면 나와 함께 가자”고 했다. 영화 ‘터미네이터 2: 심판의 날’에서 그가 사라 코너(린다 해밀턴)에게 한 대사이지만 “살고 싶으면 나처럼 백신접종을 받으라”는 권면을 에둘러한 말이다.
실제로 그는 20일 SNS에 올린 접종장면 동영상에서 “참 기분 좋은 날이다. 오늘 줄서서 기다린 것만큼 흐뭇한 적이 없었다. 뜻밖에 현장에서 몸소 안내하는 에릭 가세티 LA시장의 모습을 보고 감격했다. 나는 방금 백신을 맞았거니와 65세 이상 노인들은 한사람도 빠짐없이 접종받도록 적극 권한다. 살고 싶으면 나와 함께 가자”고 말했다. 이 동영상은 당일에만 200여만명이 접속했다.
슈워제네거는 트럼프 추종자들의 의사당 난동을 보고 나처럼 화가 났는지 “트럼프는 역대 최악의 대통령”이라고 SNS에 쏘아붙였다. 그는 “트럼프가 적법한 선거결과를 뒤집으려 획책했고 군중을 거짓말로 선동해 쿠데타를 도모했다”며 의사당을 때려 부순 폭도들이 제2차 대전 당시 자신의 모국인 오스트리아를 무력 점거하고 무자비하게 파괴한 나치군대 모습과 똑같다고 비판했다.
아놀드(73)와 도널드(74)는 같은 또래이고 같은 게르만 계열이며 덩치도 비슷하다. 둘 다 공화당 소속이고 출신배경이 연예계라는 것도 같다. 그런데 슈워제네거가 고희를 넘기고도 여전히 인기를 누리는 반면 트럼프는 역대 대통령 중 유일하게 탄핵소추를 두 차례나 당하는 수모를 겪으며 실패한 정치인으로 평가받는다.
미국의 양대 위인 대통령으로 꼽히는 조지 워싱턴은 종신대통령 추대를 사양하고 한 차례 연임 후 낙향했고, 아브라함 링컨은 백악관에서 구두를 손수 닦아 신었다. 퇴임 후 고향교회의 성경교사로 ‘복직’한 지미 카터는 망치를 들고 ‘사랑의 집짓기’ 자선단체 활동에도 앞장섰다. 버락 오바마는 추수감사절에 영부인과 함께 백악관 인근 구제소에서 홈리스들에게 칠면조 요리를 대접했다.
국민과 눈높이를 맞춘 겸허한 처신으로 존경받은 지도자는 많다. 마하트마 간디는 인분 거름통을 머리에 이고 운반했고, 손수 물레질로 짜낸 실과 천으로 옷을 만들어 입었다. 넬슨 만델라는 대통령 관저를 전임자에게 양보하고 자신은 허름한 집에서 살았다. 호세 무이카 우루과이 대통령은 연봉의 90%를 자선기관에 기부했고 1987년형 폭스바겐 자동차 한대를 유일한 유산으로 남겼다.
리더십 연구 전문가들은 겸손한 지도자들에게 공통적인 덕목이 있다고 말한다. 다른 사람들의 의견을 경청한다. 권력을 늘리기보다 섬길 대상을 늘리려고 노력한다. 자화자찬하지 않고 실수를 솔직히 인정한다. 다른 사람의 잘못에 관용적이며 쉽게 정죄하지 않는다. 공적을 자신보다 부하나 동료에게 돌린다.
“거짓말의 종점이 어딘지 나는 잘 안다”고 트럼프에게 일갈한 슈워제네거가 내 마음에 쏙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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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춘 전 시애틀 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