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SF 오페라의 음악 감독 김은선 지휘자의 행보를 보고 있노라면 마치 한 편의 드라마를 보고 있는 듯한 느낌이다. 무엇이 그녀를 금녀의 벽…. 지휘라고 하는 아찔한 곡예의 한복판으로 몰아가고 있는 것일까? 사람들은 그녀를 동양계 지휘자, 美 메이저 오페라 최초의 여성 지휘자 등으로 보고 있지만, 그녀는 그저 ‘한 명의 지휘자일 뿐’이라고 말하고 있다. 너무나도 당당하게 받아들이고 있는 그녀의 모습은 조금 비현실적이기 조차 하다. 사실 지휘라는 직업은 그동안 여성으로서는 시도하기 힘든 분야였던 것도 사실이었다. 지휘자라고 하면 흔히 남성 지휘자, 강압과 독선으로 내리누르는 고집불통 노장 지휘자의 실루엣이 훨씬 더 익숙하다. 토스카니니, 오토 클렘펠러, 카라얀, 조지 셸… 최근의 리카르도 무티에 이르기까지 모두 이런 독재형 지휘자들이었다. 오만과 독선… 괴팍한 성격까지 곁들인 뭐 이런 것들이 있어야만 명지휘자의 반열에 오를 수 있다는 착각이라고나 할까.
단원들과 함께 호흡하고 소통하는 민주적인 지휘자… 이런 것들은 그저 꿈에 불과한 것일까. 한국의 정명훈 지휘자의 이야기, 클리블랜드 오케스트라의 조지 셸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이런 모습이 얼마나 힘든가를 알 수 있다. 좋은 지휘자란 대체로 독선적인 지휘자를 말한다. 또 어느 정도 이런 독선이 있어야만 좋은 오케스트라를 이끌 수 있었던 것도 사실이었다. 즉 정상급 오케스트라를 원한다면 지휘자의 전권 위임은 불가피한 것이라는 것이다. 단원 교체, 훈련 방법, 음악성, 오케스트라의 방향 등 지휘자가 모든 것을 위임받지 않으면 정상급 오케스트라로의 발돋움은 그저 꿈에 그칠 뿐이라는 것이다. 지휘자라는 위치는 단순히 지휘자이기에 앞서 때로는 정치이며 사업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정명훈 지휘자가 서울 시향을 맡아 오늘날의 위치에 올려놓기까지에는 수많은 시련이 따랐다. 단원들의 반발, 행정적인 마찰 등이 구설수에 오르고 끝없는 진통이 연속됐다. 조지 셸이 클리블랜드 오케스트라를 맡았을 때도 비슷한 진통이 있었다. 관객은 그저 오케스트라의 객관적인 면만 바라볼 뿐이다. 공연이 끝나면 박수나 치고 그저 좋게 평가해 주면 그만이었다. 지휘자가 갈리고 악장이 갈리고 단장이 갈리는 것이야 그들의 사정일 뿐이었다. 단원과 지휘자가 서로 화합하는 시대… 오케스트라와 지휘자가 서로 소통하고 잡음 없는 공연을 이끈다는 것… 아마도 그것이 꿈이기 때문에 또 그런 전통을 세우기 힘들기 때문에 현대 사회의 오케스트라는 어쩌면 여성 지휘자의 필요성이 대두되고, 또 김은선과 같은 여성 지휘자의 시대를 기대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코로나 여파 속에서 김은선 지휘자가 파리에서 열린 프랑스 혁명 기념일(7/14) 콘서트를 지휘하여 다시 한번 각광받았다. 지난 6월 SF 오페라에서 열릴 예정이던 ‘에르나니’, 9월에 열릴 예정이던 ‘피델리오’ 등이 전격 취소되면서 김은선의 외부 나들이가 가능했다. 이날 공연에서 김은선은 외유내강, 자신만만한 모습을 전 세계에 과시했다. 동양 여성이 지휘대에 서는, 조금 생경할 수 있었던 이날의 무대를 김은선은 자신감 넘치는 눈빛, 커다란 제스처 등으로 통제해 가며 시종일관 카리스마 있는 모습을 선보였다. 파리 혁명기념일 콘서트는 프랑스 최대 행사의 하나로서로 이같은 행사에 김은선이 초대받은 것은 김은선의 현재 위치를 우회적으로 말해 주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2019년 6월 드보르작의 ‘루살카’를 지휘하기 위해 샌프란시스코를 방문했을 때만해도 김은선은 그저 떠돌이 지휘자에 불과했다. 그러나 그해 12월 김은선이 SF 오페라의 음악 감독으로 지명됐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세계 음악계는 경악했다. 김은선이 과연 어떤 인물이길래… 뉴욕 타임스를 비롯해 BBC 뉴스 등은 발 빠르게 이 소식을 보도했고 SF 크로니클지도 그녀의 인터뷰를 대서특필했다. 그러나 그녀의 인터뷰 내용은 의외로 간단하고 소박한 것이었다. 여성 지휘자가 아닌 그저 하나의 지휘자로 남고 싶다는, 너무 당연하고도 평범한 선언이었다.
미술, 문학, 음악 중에서 여성이 가장 열등한 분야가 음악의 지휘 분야였을 것이다. 19세기까지 작곡 분야와 지휘 분야에서 여성은 거의 없었고, 20세기를 지나 21세기 들어서야 비로소 한국의 김은선을 비롯해 장한나 등 여성 지휘자의 활약이 두드러지고 있다. 2005년 리카르도 무티가 ‘라 스칼라’와의 불화로 20년간 지휘했던 지휘봉을 놓은 것만 봐도 현대 음악계는 독선적인 지휘자보다는 융합형 지휘자를 선호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가능하면 단원, 관계자들과 마찰이 없는 충실한 지휘자를 원한다. 김은선 지휘자의 발탁은 이런 배경에 힘입은바 크다 할 것이지만 교향악단에서의 여성 지휘자의 벽은 여전히 높다고 할 수 있다. 지휘자로서의 리더십, 인성, 음악성을 모두 갖춘 지휘자를 찾기 힘들기 때문이다. 특히 세계적인 악단일수록 여성 지휘자가 넘보기에는 아직 유리천장이다. SF 오페라는 김은선으로서는 다음 단계 도약을 위한 절호의 기회가 아닐 수 없다. 사실 김은선이 지휘자로 발탁된 것도 대단한 일이었지만 아무 편견 없이 동양계 여성을 지휘자로 발탁한 SF 오페라의 결단도 대단한 것이었다. 김은선도 SF 오페라의 그런 분위기를 높이 사고 있으며 우선은 좋은 궁합이 예상된다. COVID 19로 아직 그 첫 단추를 끼우지 못하고 있지만, SF에서의 김은선의 활약이 기대되고 있는 이유이다. 김은선 지휘자의 지휘 모습을 아직 보지 못한 사람들은 You Tube의 ‘Concert de Paris 2020’을 통해 그녀의 2시간 반 활약을 엿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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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훈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