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와이 한인 최초의 수의사로 2013년에 작고한 고 정남영 옹 부부 <본보 자료사진>
1965년 새 이민법 이전에 많은 한국 여성들이 미국에 왔다.
한국전쟁부터 1964년까지 한국에 주둔하고 있던 미국인 군인 (미군)과 결혼한 한인 여성이 약 6천 400명이라고 전해진다.
흔히 이들을 Korean War Brides (한국전쟁신부) 라고 부른다.
그런데 “ War Brides 전쟁신부” 는 한국동란 이전에도 있었다. 따라서 ‘전쟁신부’라기 보다는 ‘미군 신부’ 라는 것이 더 적합하다.
어쨋거나 ‘전쟁신부’의 미국 입국은 1945년 2차대전 동안 많은 미군이 주둔하고 있던 유럽 여러나라의 여성과 결혼하면서 시작되었다.
1945년 12월 28일에 War Brides Act (전쟁신부법) 가 시행되면서, 외국인 여성과 결혼한 미군은 부인과 함께 미국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15만명 내지 20만명의 미군의 신부가 입국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이 신부들은 모두가 유럽국가 여성이었고, 한인과 일본인 등 아시안 부인들은 이 법의 혜택을 받을 수 없었다.
1924년 이민법 (‘아시아인 배척법’으로 불려 짐) 에 의하여 미국에 이민할 수 있는 종족은 실질적으로 유럽인으로으로 제한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1947년 7월 22일에 이 전쟁신부법이 개정되어 아시아인 신부가 미국에 올 수 있게되었다.
전쟁신부법이 개정되는데에는 하와이 한인 2세의 노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는 아래와 같다.
1911년 8월 15일에 카우아이섬에서 출생한 찰스 리 (Charles 철주 Lee) 가 1944년 9월에 해군 예비군으로 남태평양 마리아나제도의 사이판에 주둔하게 되었다.
그 곳에서 부산에서 자란 서학란 (1925년 생)을 만나 1945년 10월 27일에 결혼하였다.
이철주는 1946년 2월에 해군에서 퇴역한 후 부인과 함께 하와이로 돌아올 예정이었다.
그러나 서학란은 1924년 이민법으로 하와이에 올 수 없었다. 이철주는 1945년 12월부터 국무성에 요청서를 보내 부인이 미국에 입국할 수 있는 길을 모색하였다.
1946년 2월 21일에 미국 하원의 하와이 대표 조세프 패링톤 (Joseph R. Farrington; 하와이가 미국의 영토였음으로 하원의원이라 부르지 않고, ‘하와이 대표’라고 불렀다)이 서학란이 입국할 수 있도록 하원 입법안 (House Resolution 5704) 을 상정하였다.
1947년 1월 13일에는 서학란에게 영주권을 부여하는 입법안 903을 상정하였고, 4월 22일에는 입법안 3149을 상정하였다.
입법안 3149는 1945년에 시행된 전쟁신부법을 개정하여 ‘1947년 1월 이전에 미국시민과 결혼한 배우자가 종족 (race) 이유만으로 미국 입국이 거부’ 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이 법안은 긴 입법 과정을 통과한 후 1947년 7월 22일에 기존의 전쟁신부법을 개정하여 미군과 결혼한 아시아인 부인의 입국/이민을 허가하였다.
1947년 10월 29일에 서학란이 호놀룰루에 도착하였다. 스타 블르틴지는 11월 7일에 이들 부부의 이야기를 실으면서, 이철주가 남태평양 섬에서 결혼한 첫 미군이라고도 했다.
(참고로, 패링톤은 1975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한국 이민에 대한 제도적 차별을 제거하는데 공헌’하였기에 국민훈장 무궁화장이 추서되었다. 칼리히 지역에 있는 패링톤고등학교는 그의 아버지 왈레스 (Wallace R. ) 하와이 영토 지사 (1921-1929 재임)의 이름을 딴 것이다.)
개정된 전쟁신부법의 혜택을 받은 이 중에 1916년 2월 5일에 와이알루아 농장에서 태어난 정남영 (Nam Young Chung)이 있다.
1945년 9월 8일부터 1948년 8월 15일까지 이른바 미군정 통치 기간동안에 미육군 보병사단 7만 7천여명 (1년 후 약 5만 9천명으로 감소) 이 한국에 주둔하였다.
정남영 (후에 수의사)과 허버트 최(Herbert Choy 후에 연방법원 판사) 등 하와이 한인 2, 3세들도 포함되었는데, 이들은 한국어를 조금 구사할 수 있는 그야말로 ‘엘리트’ 장교였다.
정남영은 미군정 농림부에서 일을 하면서 농촌 시찰을 다녔다. 당시 코닥 칼라 필름이 판매되기 시작했을 때여서, 칼라 사진을 찍었다.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수립 기념식에서도 칼라 사진과 ‘활동사진’을 찍었다. (이 사진은 천안의 독립기념관에 기증/보관되어 있다.)
정남영은 한국에 주둔하는 동안 오숙자 (숙명여대 출신)를 소개받아 1946년 10월 12일에 미군정청 (중앙청)에서 결혼식을 올렸고, 경회루에서 피로연을 가졌다.
아마도 중앙청 결혼식과 경회루 피로연은 이것이 처음이며 마지막 이었을 것이다. 정남영은 퇴역하고 하와이로 돌아올 준비를 하였다.
1924년 이민법 때문에 부인 오숙자와 함께 올 수 없는 것을 알게 된 정남영이 패링톤 대표에게 도움을 청했다.
패링톤에게서 개정안이 통과될 것 같으니 좀 기다리라는 답을 받았다.
정남영은 개정된 전쟁신부법에 의하여 식구 (그 동안 아들이 태어남)와 함께 1948년 12월에 하와이로 왔다.
호놀룰루에서 잘 알려진 할라 함 무용소 설립자 배할라는 한인 2세 미군 존 함과 결혼하고 1950년 8월 경에 호놀룰루에 도착하였다.
할라 함이 왔을 때는 전쟁신부법이 소멸 (1948년 12월 31일)된 이후였다.
아마도, 남편 미군 존 함이 국무성에 요청하여 특별 허가를 받고 온 것 같은데, 전혀 알려진 것이 없다. <다음 주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