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련의 바다에서 표류할 것인가 아니면 서핑할 것인가
우리가 둘째에게 생일선물로 준 시계.
이 이야기들은 실화이며, 또한 사랑의 이야기들이다. 그러나, 남녀 간의 그런 달캉달캉한 이야기는 기대 안하시기 바란다. 이 이야기들은 남자이기에 언제, 어디선가 한 번쯤 경험해 보았을, 그래서 이제야 남자라고 혼자서 묵묵히 걸을 수 있는, 그런 위치에 다다른 남자들에게 바치는 사랑의 오마주(Homage)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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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 매상 5만불 가발 가게 사장님
한국 사람만큼 돈 이야기 좋아하는 민족도 드물 것이다. 한국의 방송에 등장하는 많은 분들이 가발이라면서 와이프가 내 손을 잡아끌어 대형 가발 가게를 따라갔다. 요즘 ‘집콕’ 스트레스 탓인지 정수리 부분이 허해져서 ‘속 알 머리 없는 남자’가 되어가는 내 모습이 사뭇 처량하기도 했다.
넓은 매장에 진열된 가발을 보니 한국에서 가발 공장 하셨던 돌아가신 아버님이 떠올랐다.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와이프는 매장을 쏘다니며 내 머리에 이 가발 저 가발 갖다 맞추어 본다. 젊고 착해 보이는 흑인 종업원들이 친절하게 도와주었지만 막상 남자 가발은 없었다.
하지만 다른 상품을 구입했는데 계산대에서 주인으로 보이는 한국 분(아저씨)이 말을 걸어왔다. 고맙다고 인사하고 나오려는데 뜬금없이 이 가발 가게 너무 잘된다며 주 매상이 5만불이상 오른다고 말씀하셨다. 그때 ‘탁이’의 “네가 거기서 왜 나와?”가 떠올랐다. 초면 손님에게 가게 매상까지 말할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흑인들이 주로 오는 상점에 한인 부부가 불쑥 나타나자 혹시나 가격 체크 하러 온 경쟁자 아니면 가게 찾는 사람으로 오해 하셨나 생각되었다. 나도 하루 이틀 장사 해본 사람이 아니라서 이해했다. 여하튼 미국 사람이었다면 절대 불가능한 장면이 연출된 것이다.
# 1975년 한인세탁소는 단 1개
한인 최대 단일 업종으로는 미국인들을 상대로 하는 세탁업이 있다. 며칠 전 우연히 1976년 3월 25일자 한국일보를 접하게 되었다. 한국일보가 한인회(당시 단일 한인회였다)와 공동으로 워싱턴 지역 한인업소를 조사한 내용이 상세히 보도되어 있었다.
미주판 표지에 업종별로 나열 되어 있는 결과를 보고 심히 놀랍지 않을 수 없었다. 여러분은 한인들의 세탁업소가 몇 개나 되리라고 짐작하는가? 놀랍게도 단 2개 업소뿐이었다. 전년도인 1975년도에는 단 1개 업소였다. 업종별로 단일 업소들도 많았다. 변호사, 보험, 은행 등도 단 한군데여서 그분들은 당시 독점사업을 하고 있었다. 호랑이 담배 피던 시절이라고는 하나 불과 45년 전 일이다.
# 2천335개 업소로 성장
더욱 놀라운 점은 31개에 달하는 가발 업소가 당당히 1위에 등극해 있었다. 1970년, 왜 우리 아버님이 가발 무역하신다며 미국에 무작정 오셨는지 이해가 가는 부분이었다.
내가 세탁협회 회장을 역임하던 2002년도에 직접 발로 뛰며 이 지역 한인 세탁 업소를 방문하고 얻은 정보를 바탕으로 한인 세탁업소록을 집대성했다. 이때 방문한 업소가 2천3백35가게였다. 어느 무더운 여름날은 45군데 세탁소를 방문하며 문전박대를 피하기 위해(?) 사장님들에게 세탁 정보지와 형광등 등을 무료로 배포해 드리기도 했다. 내 사업보다 협회 일에 전념하던 시기였다. 그 이야기는 다음으로 미룬다.
그렇다. 1976년에서 2002년까지 26년간 한인 세탁업소가 무려 2천3백33개로 불어났다. 물론 한인 인구도 성장했고 업종간의 이동도 있었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나는 워싱턴 지역을 벗어나 불모지와도 같은 웨스트버지니아와 버지니아 서남쪽 그리고 메릴랜드 북서쪽까지 모두 답사해서 얻은 정보였다. 그런데 이번 코로나 사태로 전대미문의 대 폭풍이 세탁업계를 강타하고 있다.
# 맥클린, 베데스다 등 부촌을 돌아보니
지난 토요일, 부촌으로 알려진 맥클린 지역을 돌아보았다. 비엔나, 체비 체이스, 베데스다 등 부유층 지역은 상대적으로 임대료도 비싸지만 경쟁이 심한 지역들이다. 한때 12시간 운영이 모자라 7일 영업하는 세탁소가 있을 정도였던 과열 경쟁은 사라진 듯 보였다. 매년 불황이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던 사람들 그때 불황이 사실 호황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12군데 방문한 세탁소 중 5업소가 폐업했고 나머지 업소들도 영업시간을 전폭적으로 줄이거나 공장을 픽업으로 축소하고 대부분 종업원 한명이 달랑 썰렁한 카운터를 지키고 있었다. 당신은 시련의 바다에서 표류할 것인가 아니면 서핑할 것인가?
# 세탁소 폐업으로 7억5천만불 손실
작년 봄 코로나 사태가 번질 무렵 저녁 모임에서 그동안 너무 한인끼리 경쟁이 심했다는 말씀을 하시며 이 시기에 좀 정리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시던 선배가 있었다. 그 선배 바로 옆자리에는 불과 얼마 전만해도 주 1만5천불 올린다며 술자리에서 떠버리던 친구가 있었다.
예전 세탁업소 가격은 주 매상의 50배였다. 그렇다면 75만불짜리 가게 주인이라는 단순 계산이 나온다. 그런 상점을 접는다는 것은 75만불의 손실이다. 그렇다면 한인 상점 1,000곳이 폐업한다면 7억5천만 불에 달하는 경제 손실을 의미한다. 한 한인 사업의 폐업은 그 개인의 문제를 떠나 우리 전체 한인사회의 자산 손실임을 잊지 말아야한다.
# 한인 사업주들의 현 주소
나는 35년 세탁인생에서 총 25개 세탁소를 차렸었다. 그중 5군데를 폐업했고 8군데를 팔았다. 현재 12군데 영업하고 있다. 들뜬 마음으로 처음 차렸던 DC의 픽업 스토어, 그 후 어렵게 얻은 융자로 차린 우드브리지 공장 모두 내 손이 안 닿은 곳이 없었다.
수많은 임대 계약서 내용들, 카운티에서 힘들게 얻어낸 허가증들. 먼지 뒤집어쓰며 했던 공사들. 기계 설치를 위해 꼬박 지새웠던 밤. 계산대 옆에는 세월을 증언이라도 하듯 벽에 붙은 종이쪽지들이 나를 쳐다본다.
모두 내 열정, 노력 그리고 시간들이 깃들어 있는 증거물들이다. 이심전심 다른 업종에서도 같은 희망으로 시작했던 사업가들이 존재한다. 전 자산을 퍼부었던 우리 한인 사업주들의 현 주소는 어디인가?
한 가정의 불행은 우리 사회의 불행이다. 노력에 대한 대가가 없을 때 용기를 잃게 된다. 맨손으로 할렘 슬럼가에 뛰어들었고 청과물 시장을 석권하며 성공의 신화를 썼던 미주 한인들이 그 용기를 항상 가슴에 간직하며 살아가길 희망한다.
# 세상은 돌고 변한다.
1976년도 기사가 시사하듯 세상은 변천하며 발전해 나갔다. 와이프와 재혼할 당시 내 수준에 돈이 없어서 예물을 해줄 형편이 못됐다. 나중에 돈 벌면 잘해주겠다는 약속이 전부였다.
얼마 후 어려웠던 나에게 와이프가 조용히 자신이 차고 있던 로렉스 시계를 풀어서 내게 건네며 전처 사이에 낳은 둘째 딸 생일선물로 아빠로서 선물하라고 주는 것이었다. 이미 다 성장하여 직장 다니는 딸에게 그럴 필요 없다고 하자 박스까지 챙겨주며 아빠가 선물 하는 것으로 하라며 신신 당부했다.
와이프가 지시한대로 했는데 둘째가 선물을 너무 좋아했다. 얼마 후 사업 형편이 나아지자 새 로렉스를 구입해서 이번에는 와이프 생일 선물로 했다. 지금도 둘째는 아빠가 해준 선물이라며 열심히 차고 다닌다.
미국인과 한인의 큰 차이점 중 하나는 미국인들은 사업 이윤이 안 나면 가차 없이 접어버리고 다른 것에 전념한다. 이 또한 정이 많은 한인들이 배워야할 좋은 면이다. 현재 접는 사업이 다음 기회를 열어주는 문일 수도 있다. 마치 와이프가 오래 몸에 지니던 시계를 딸에게 넘겼 듯…. 모든 분들의 건승을 기원한다. <다음에 계속>
글·사진/ Jeff Ahn
(jahn8118@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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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eff Ahn>